정신개벽과 정신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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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개벽과 정신 차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1.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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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1

원불교 개교의 동기에 대해 정전에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한 ‘정신개벽’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신’이라는 단어를 ‘육체나 물질에 대립되는 영혼이나 마음’으로 뜻풀이하고 있으나 우리의 정전에서는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라고 밝혀 놓았다. ‘정신’이라는 단어를 서술어인 ‘~없다’, ‘~빠지다’, ‘~차리다’와 함께 쓰이는 환경을 고려하면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온전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정전의 뜻풀이가 사전의 뜻풀이보다 우리말의 실제 쓰임에 더욱 가깝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개벽’은 ‘온전한 마음으로 정신 차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초롱초롱하게 본래 우리 면목에 뿌리를 내린 채 깨어 있어야 한다. 종법사님께서 원기 93년 신년 법문에서 강조하신 ‘정신개벽과 정신의 자주력’도 ‘온전한 마음으로 정신 차려 살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을 말씀하신 것이다. 평소의 삶에서 잠시만이라도 우리 삶을 돌아보면 정신 차리고 있는 시간보다 정신을 빼놓고 살고 있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누구나 자랄 때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리니?” 라고 혼이 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처럼 습관 떼기가 쉽지 않아서 ‘순간순간 정신 차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공부인지는 정신 차리려고 노력해 본 사람만이 안다. 흔히들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표현처럼 수도의 본뜻도 사실 정신 차리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공자님께서 마흔에 미혹된 바가 없어졌고, 칠십에 행하는 바 모두가 법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그 경지도 정신 차리는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불조사들은 순간순간마다 정신을 빼놓지 않고, 차리고 살기 위해 눈에 불을 쓰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던 것이다.


대종사께서 깨우쳐 주신 ‘정신개벽의 공부법’도 신기하고 별난 공부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온전한 마음을 챙기며 밝혀서 세상사에 온몸으로 정신 차려 살자는 것이다. 부동의 불방심(不放心)이 바로 ‘정신 차리기’이다. 염불, 좌선으로 온전한 마음을 찾아 기르고,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로 실생활에서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마음의 빛을 밝히고, 상시일기, 주의, 조행으로 정신 빠지지 않는 삶을 살도록 깨우쳐 주셨던 것이다. 우리 수행법에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일상에서 정신 차리고 살면서 복 짓는 데에는 출가와 재가를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 이런 정신이 정말 소중하다고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정신없이 살아갈 때 선생님으로부터 회초리를 맞고 눈물을 쏙 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처럼 실제의 생활에서 경계마다 온전한 마음을 챙기지 못해 진리로부터 혼이 날 때가 있다. 주변과 부딪치면서 괴롭고 힘들어질 때, 생활이 어려워질 때, 지난 시간을 잠시라도 돌아보면 바로 매순간마다 온전한 마음으로 깨어 있지 못했던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법신불 앞에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며 순간순간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 기도해야 한다. 촛불을 켜고 참회 기도할 마음이 나지 않으면 그만큼 정신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스승님을 찾고, 성지를 찾아 가야 한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스승님의 빛으로, 성자의 기운으로 스러져가는 내 정신의 빛을 돋우고 밝혀야 한다. 온전한 마음의 소중함으로 몸서리칠 때까지. 돈암교당 /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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