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발성지 쿠시나가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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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발성지 쿠시나가르로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1.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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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덕권 교도의 천축구도기 12

룸비니는 인도와의 접경지대다. 아침 6시 30분 대성 석가사를 출발해 국경관문인 스놀리에 도착했다. 국경이라고 해서 삼엄한 곳으로 생각했는데, 양쪽 국민 모두가 아무런 제제 없이 자유로 통과한다. 이방인만 네팔과 인도 출입국관리소에 신고를 하면 되는 모양이다.


열반성지 쿠시나가르는 2시간이나 걸리는 고락푸르까지 가서 기차로 또 몇 시간이나 달려야 갈 수 있는 머나먼 길이다.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고락푸르까지 택시를 합승했는데 이것이 총알택시다. 마치 죽을 줄 모르고 달리는 미친 말과 같다.


고락푸르 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하니 또 몇 시간을 기다리라고 한다. 할 수 없이 완행버스를 집어타고 짐짝처럼 실려 쿠시나가르로 향했다. 룸비니로부터 일곱 시간이나 걸렸다.


쿠시나가르는 겨우 18,000명 정도 사는 시골의 작은 읍지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작은 시골이어서 제자들이 부처님의 열반지로는 너무 초라하니 큰 도시로 옮기자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침 쿠시나가르에도 한국 절이 있다고 해 룸비니의 대성 석가사를 연상하고 달려갔더니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스님은 얼굴도 볼 수 없었고 안내하는 현지인의 뒤를 따라가니 도저히 숙소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낡은 창고 같은 수준이다.


할 수 없이 되돌아 나와 ‘패틱니와스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선 열반성지 부터 참배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무상정각을 얻으신 후 45년간 녹야원에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법을 설하시다가 이 쿠시나가르에 오시게 되었는데, 어떤 재가 여인이 공양한 튀김요리를 드시고 배탈이 나셨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가 열반지 임을 깨달으셨는지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라쌍수 그늘 아래 몸을 누이신 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최후법문을 설하시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의 마지막 곽시쌍부(槨示雙趺)의 이적을 보이신 곳이다.


바로 그 자리에 열반당이 세워져 있다. 5세기에 와서야 그 자리가 발견됐는데 주위에는 건물의 터와 붉은 벽돌 잔해들만 널려있다. 고요한 연못이 주위를 감싸고 있고 참으로 그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열반당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울컥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바로 눈앞에 21피트, 약 7m의 황금와불(黃金臥佛)이 누워 계시는 것이 아닌가! 통 돌로 조각이 되어 있다고 한다. 황금으로 덧 씌워져 있으며, 각국의 불자들이 황금실로 정성들여 짠 이불이 덮여져 있다.


이 와불은 사람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서 부처님의 얼굴이 다 달라져 보인다. 발끝에서 보면 그 미소가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고, 어깨너머로 보면 짙은 우수에 잠겨 계신 것도 같다.


장엄한 부처님의 열반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거대한 사라쌍수 나무그늘아래 하염없이 앉아있는 순례자의 머리위로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어 간다.




열반성지 쿠시나가르



탄생성지 룸비니를 떠난칠시간


인도국경 통과하여 천축에왔네


한국면적 이십칠배 십억인구가


원시성과 초현대가 어우러지고


힌두교와 불교도들 말썽없으니


떠오르는 인도의힘 알수없어라




곽시쌍부 삼처전심 모두전했나


사라쌍수 그늘아래 열반상나퉈


열반당에 황금와불 살아계신듯


삼천년의 오랜세월 시공을넘어


수수만리 당신찾은 한국수행인


무릎꿇고 두손모아 교감하였네




보드가야 무상정각 깨치신뒤로


사십오년 팔십평생 무량한법문


단한법도 설한바가 없다고하신


쿠시나가 열반당의 그날의함성


전쟁불사 팔대강국 나눈사리도


제행무상 최후법문 모두덧없어


여의도교당 교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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