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록옷을 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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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록옷을 사랴?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3.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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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성하 교무의 미국교화 이야기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나요? ‘다문화, 다양성에 대한 배려는 글로벌한 마인드요, 배울 만큼 배운 지성인의 매너이며, 세상에 정해진 꼭지점은 없으니 누구를 중심이라 하랴, 나는 나대로 세상의 중심이요 유일자도다.’ 하여 ‘아침에 김치국에 밥 말아 먹고 학교에 간들 뭐 그리 기죽을 소냐, 갈치 한조각 구워 먹고 학교 갔기로 서니, 우유에 씨리얼 말아먹고 온 애들에게 미안할 건 또 뭔가….’




미국 살이가 시간을 더해 갈 수록 지난날 모국서 익혀온 것들에 대한 회귀가 하나씩 둘씩 들어가면서 얼굴도 따라서 두꺼워 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저의 문화적 자긍심이나 뻣뻣한 배타성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이럴 수 있는 고집의 배경은 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한마디로 누울 자리가 보이기 때문에 발을 뻗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속이 편합니다. 로마인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기왕 예까지 온거니 우리집 풍속 좀 따르면 어떨까.’라는 것인데 뭐 어렵겠습니까? 로마법 좀 따르지요. 그런데 태생이 로마인이 아닌 까닭에 심력을 쓰지 않으면 놓치니, 심력을 쓰지 않아도 놓치지 않아야 길이 잘든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성 패트릭 데이랍니다.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패트릭이라는 성인은 아일랜드에 처음 기독교를 전파하신 분이라는 군요. 미국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은 시장 마케팅에 종사하시는 분들 같습니다. 크리스마스도, 부활절도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마켓에 일단 먼저 도착을 합니다. 목사님이 주옥같은 법문으로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시기 전에 마켓팅 종사자들이 내놓은 갖가지 상품이 먼저 고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초록색 물건들이 진열되기 시작하면서 성패트릭 데이가 가까운가 보다 하고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요,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 이제 그런 기념일이야 안중을 떠난지 오래라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당 꼬맹이 유학생을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보니 안내 데스크의 선생님이 초록색 수첩에 연두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패트릭 데이의 상징색은 초록색입니다. 우리집 꼬맹이는 회색 티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데려다 주는 교무는 공식 컬러인 검정색으로 위 아래를 입었는데,오늘따라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이국적이던지요. 저야 교당으로 돌아갈 일이니 괜찮습니다만, 애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선생님도 우리 때문에 괜히 미안하던지, 미국에는 별스런 바보같은 전통이 다 있다는 자책을 하시더니 아이에게 초록색 가슴 리본을 달아주겠다고 하며 애를 데리고 들어갑니다. 사실 성 패트릭 데이는 그다지 큰 축일은 아니기 때문에 아이리쉬 학교가 아닌 이상은, 재미로 초록색 옷이나 물건들로 색깔 맞추기 패션을 할 뿐 종교적으로는 아무런 특별한 행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색깔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별일인 것입니다.




교당에 상주하는 애들이 없었던 시절은 그까짓것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던 모든 미국의 자잘한 기념일에 대해 이제는 학교라는 제도권 아래 애들이 적을 둔 이상 바람직한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발렌타인 데이라고 카드와 초코렛 패키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학교에 대해 우린 그런것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수도 없고 대승적 문화 수용으로 지갑을 열어야 합니다. 오마이 갓! 이제 보니 로마로 가는 길은 시장을 통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콜로라도 덴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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