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의 신앙과 수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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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의 신앙과 수행7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4.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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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 12

삶과 죽음이 단지 오고가는 거래에 불과하므로 우리 영혼은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불생불멸한다는 진공(眞空)의 이 진리를 믿어야 한다. 또한 진공한 가운데서 각자 지닌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인과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 진리를 믿지 않은 신앙과 수행은 죽어 버린 신앙과 수행이라고 말씀드렸다.


살아 있는 신앙과 수행, 죽어버린 신앙과 수행은 무엇을 보고 구별할 수 있는가?


대종사님께서는 정전에서 ‘개교의 동기’로 고통에 빠진 중생들의 삶을 복된 낙원으로 인도하시려는 목표를 분명히 밝히셨다. 그러므로 대종사님께서 깨우쳐 주신 일원대도를 신앙하고 수행하는 우리들이 은생어은(恩生於恩)과 은생어해(恩生於害)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면 이것은 각자의 신앙과 수행이 생생하게 살아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되어 버린다.


이런 삶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일상생활에서 서원과 믿음이 빠져 있거나 설령 있더라도 약해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중생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 반드시 일원상 서원의 바다에 스스로를 빠트려야 하고,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목숨처럼 소중히 믿고 받들어야 한다.


이렇게 서원과 믿음이 서 있어야 살아 있는 신앙과 수행이 될 수 있고, 생생한 신앙과 수행이어야 비로소 ‘팔자(八字)’라는 자신의 운명을 자유의지(自由意志)대로 조각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조물주로 변화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서원과 믿음으로 충만해진 일상의 매 순간순간은 다시 온전한 마음을 찾아 정신을 차리려는 마음공부의 적공(積功)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적공의 순간순간이 내 영혼의 앞에 놓인 영겁의 세월에 새털처럼 쌓일 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원, 믿음, 적공은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의 신앙과 수행에서 삼위일체이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마음공부의 핵심이라 하겠다.


음양오행의 이론으로 인간의 운명을 감정하는 추명학(推命學)에서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기준으로 팔자를 감정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추명학의 대가라도 운명의 감정을 통해 사람의 팔자를 바꿔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내 운명의 조물주는 열반경의 말씀처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라는 이 존재는 과거에 어떤 서원과 믿음으로 어떻게 적공하였느냐 하는 결과이고,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어떤 서원과 믿음으로 어떻게 적공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깨닫게 되는 분명한 사실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의 일들과 인연들이 짧게는 어제일 수 있고, 좀 더 길게는 몇 년 전 만들었던 원인의 결과이므로 결코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만들게 된 그 원인의 원인마저도 길게는 영겁의 세월 동안 마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인의 결과이므로 중생은 고통의 바다에 한 번 빠지면 그 고통으로 인해 또 다른 고통을 낳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이 되어 불법을 만나 은생어은, 은생어해의 도를 배워 해생어은, 해생어해의 삶을 끊어 버리게 되는 것은 마치 눈 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나무 조각을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행스럽게 대종사님의 일원대도를 만나서 공부하게 되었다. 정산 종사께서 “대종사께서 이 일원상으로써 교리의 근원을 삼아 모든 공부인으로 하여금 이를 신앙케하고 이를 연구케 하며 이를 수행케 하신 것은 곧 계단을 초월하여 쉽게 대도에 들게 하고 깊은 이치를 드러내어 바로 사물에 활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는 이가 이 외에 다시 구할 곳이 없고 도를 찾는 이가 이 외에 다시 찾을 길이 없으며 그 밖에 일체 만법이 이 외에는 다시 한 법도 없나니라.”라고 하신 법문이 가슴 서늘하게 다가온다.


서원과 믿음, 적공으로 미래를 열어가겠노라고 다시 한 번 더 다짐해 본다.


돈암교당/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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