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법신불사은님 2
상태바
아아! 법신불사은님 2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5.07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17

대종사님께서는 정전 제1 총서편 교법의 총설에서 불교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 근본 원리는 본래 하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인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므로 모든 교파가 각각 분립하여 서로 융통을 보지 못하고 있고, 이런 현실은 모두 부처님과 성현의 본의가 아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원불교는 출세간을 떠나 모든 생령이 부처님의 은혜를 입도록 하기 위해 둥그신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과 수행의 대상 및 그 표본으로 하였고,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네 가지 은혜와 수양·연구·취사의 세 가지 공부법으로 신앙과 수행의 강령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강령(綱領)이란 ‘으뜸되는 줄거리’를 말합니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목적이나 목표, 계획, 방침, 규범과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정전에서는 ‘줄거리’라는 단어 대신에 ‘내역(內譯)’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는 ‘명세(明細)’라는 단어가 가깝다 하겠습니다. 표본은 본보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둥그신 일원상이 신앙과 수행의 본보기라면,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네 가지 은혜는 ‘신앙의 명세표’이고,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 취사의 세 가지 공부법은 ‘수행의 명세표’입니다.


따라서 누가 여러분들에게 원불교는 무엇을 믿느냐는 질문을 하면, “우리는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을 믿습니다.” 라고 답을 할 수 있고, “그 일원상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라고 다시 물으면 “그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은 성현이나 중생이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래의 불생불멸한 성품으로서 우리 안에 갊아 있는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서 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는 우주 만유에 가득하되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네 가지 은혜로 구분되고, 인과보응의 진리로써 이 세상을 주재하시는 분입니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의 섭리가 바로 네 가지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건을 살 때 제대로 샀는지 명세표를 확인하고 대조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을 바르게 신앙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네 가지 은혜에 보은하고 있는지를 늘 대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독심과 무명이라는 업장에 가려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잃어버린 중생들은 이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존재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설령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다가갔어도 사은의 은혜를 망각해 버립니다. 그러면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을 모르는 중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표시가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 어떠하든 간에 일상의 생활에서 원망의 병에 빠진 분들, 일이 터지면 내 탓은 살필 줄 모르고 네 탓만 하는 분들은 대개가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을 믿어도 이 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에 원망의 마음을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과 사물의 이치를 해석할 때 내 탓 아닌 상대방 탓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면 내 속에 원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가르침과 법에 머리와 가슴으로 다가갔더라도 차마 몸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매사에 남을 탓하게 되는, 이 원망심 때문입니다.


내 탓으로 돌리는 공부법이 우울증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네 가지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 탓’으로만 몰아가면 아마도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을 믿음의 본보기로 삼고 이 분의 내역이 네 가지 은혜라는 것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보면 시련과 고통은 그저 따스한 봄바람일 뿐입니다.


우리 원불교 교화에서는 출가자 한 개인의 출중한 능력도 소중하지만 교화지의 임기가 정해 있어 순환하며 근무하는 체계 아래서는 출가자의 뛰어난 능력보다는 함께 하는 팀워크가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상대방을 원망하는 분위기가 교당에 돌면 안 됩니다. 잘된 것은 네 덕이고, 잘못되면 내 탓이라는 훈훈한 분위기가 교당을 감싸고 돌 때 교당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 찾아와서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탓하고 싶을 때는 딱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서 용납이 안 되고 억울한 생각이 들면 법신불께 진솔히 고백하고 그분과 대화해야 합니다. 특별한 기도 의식을 통한 대화일 수도 있고, 수시로 마음을 모아 심고하는 대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법신불 부처님께서는 내 안에 다가오셔서 조용히 질문을 던지십니다. “어느 생을 오고 가면서 네가 그렇게 완전무결한 존재였느냐?” 그렇습니다. 다생 겁래에 만들었을지도 모를 내 탓입니다. 그래도 억울합니다.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다가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목 놓아 울면서 법신불 부처님과 대화하고 나면 그 사람 탓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게 됩니다. 내 깊숙한 곳에 있던 본래 감춰진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어찌하면 공심(公心)이 양성되는 것입니까?”라는 학인의 물음에 답하시기를 “이 몸이 사은의 공물임을 알 것이요, 그러므로 보은은 의무임을 알 것이요, 인생의 참 가치는 이타(利他)에 있음을 알 것이요, 자리(自利)의 결과와 공익의 결과를 철저히 자각할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감사 생활만 하는 이는 늘 사은의 도움을 받게 되고, 원망 생활만 하는 이는 늘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주 만유에 가득한 이 네 가지 은혜를 발견하고 보은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진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대종사님 덕분에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의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늘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과 함께 하면서 이 분의 내역인 네 가지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는 철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서 매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법신불 사은님의 가호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암교당/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