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 문화의 발원지를 찾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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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 문화의 발원지를 찾아서 3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6.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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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윤덕 교무의 마음으로 만나는 유럽이야기



인간중심 문화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 도시의 오늘을 있게 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소회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인 이 가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보호자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굴지의 금융업자로서, 또 피렌체 공화국과 토스카나공국의 지배자로서 유명하다. 원래 피렌체 동북의 무젤로 지방 출신인 메디치가는 상업으로 성공하여 14세기부터 피렌체 정치계에 등장하였다.


치옴피의 폭동(1378~1382) 때, 이 가문의 한 사람인 살베스트로는 민중 편에 가담하여 지배층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기 때문에 민중들의 신망을 얻었다. 얼마 후 조반니 디 비치(1360~1429)는 상업과 교황청의 은행가로서 거금을 모으자, 이를 발판으로 정치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1389~


1464)는 구 지배층과 대립하여 수년 동안 추방을 당한 후, 민중의 지지와 상업자본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하고 피렌체 공화국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의 재정을 장악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사재를 시정에 투입하고 학문과 예술을 보호 장려하였다.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


1492)때에 피렌체와 메디치가의 번영은 정점에 달하고, 그의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도 이 때인데,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특히 철학 연구를 장려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1471~1503)는 무능하여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자 이에 굴복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추방되었다(1494).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남하했을 때(로마의 약탈), 잠시 피렌체를 쫓겨난 메디치가는 얼마 후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다. 이 가문은 위에서 언급한 2차례의 짧은 공백기(1494~1512, 1527~30)를 제외하고 1434~1737년에 걸쳐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했으며,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피우스 4세, 레오 11세 등 4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가문을 이은 먼 친척인 코시모 1세(1569~1574)가 1569년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1541~1587)는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로서는 존경을 받았다. 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는 프랑스왕 앙리 4세의 왕비가 되어 역사 속에서 마리 드 메디시스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가는 그 후 유럽의 군주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후 차차 세력이 쇠퇴하여 1737년 7대째의 대공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가계가 단절되었고, 이 가문의 전 재산은 피렌체와 가톨릭교회에 기증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존되 오고 있다.


필자가 굳이 메디치 가문을 거론하는 이유는 농민에서 환전상으로 시작한 평범한 가문이 세계문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공도자 가문으로 남게 되는 영광을 어떻게 얻었을까? 하는데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지인들에게 원불교를 전하는 본인으로서는 이 가문 출신 레오10세 교황에 의해 다시 부활한 면죄부판매가 기독교에서 보면 동양종교의 유입을 막는 역할도 하는구나 하는 역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유럽은 세금으로 종교를 운영하기에 성직자들이 옛날처럼 큰 부자는 아니다.


한국에서 불교나 원불교는 천도재나 제 의식에 상당한 수입을 의존하는데 유럽인들은 천도재나 제 의식에 돈이 결부되는 것을 마치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과 동일시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심어준 레오 10세를 비롯한 이 가문의 네 교황은 한분도 성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럽인들에게 부는 불교의 바람을 재정적인 면에서 막고 있거나, 현지화 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으니 어떻든 자기 종교엔 좋은 일을 지금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민의 집에서 세계유산으로 성장한 그들의 문화처럼, 도도한 일원의 진리의 흐름은 지금은 출발점이지만 유럽을 또 다른 정신적 부활을 하게 할 것이다.


레겐스부르크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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