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법신불사은님 14, 일과로 득력하기와 동포 은혜에 보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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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법신불사은님 14, 일과로 득력하기와 동포 은혜에 보은하기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8.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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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현성 교도와 함께하는 정전공부 29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로서 홀로 있으면 외로워지고, 외로운 상태를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자연 상태를 돌아볼 때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서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우리가 동포에게서 입은 은혜를 가장 쉽게 알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사람도 없고 금수도 없고 초목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라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볼 것이니, 그런다면 누구나 살지 못할 것은 다 인증할 것이다.”라고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위 인연들을 증오하고, 주위 인연들과 싸우면서 동포의 지중한 은혜를 망각할까요? 왜 내 마음에서 사랑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나’라는 이 존재는 원래 ‘나’ 이외의 바깥 존재와 마음을 연하면서 기운을 통해야 살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이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못 느낄까요?


효산 조정근 종사께서는 효산록2권 251쪽에서 일과(日課)가 무너질 때 주위 인연과 불화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인연들과 불화가 생기면 증오를 불러오고 증오가 싹트면 지금 이 순간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 인연이 내게 복 주고 죄 주는 바로 법신불의 존재라는 것을 잊게 됩니다. 자연히 동포에 보은하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좌산 상사 법문 ‘일과로 득력하기’


‘일과로 득력하기’를 강조하신 스승님은 바로 좌산 상사이십니다. 좌산 상사께서는 종법사 취임 직후 ‘일과(日課)로 득력(得力)하자’는 법문을 내리시면서 일과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일 그일을 일심으로 하면 수양력이 쌓이고, 일마다 연마하여 알음알이를 찾아가면 연구력이 쌓이고, 대소사간(大小事間) 정의만을 실행해 가면 취사력이 쌓인다.”고 하시면서 새털같이 많은, 매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도록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좌산 상사의 ‘일과로 득력하기’의 핵심은 새털 같은 일상의 생활에서 수양 연구 취사의 삼대력을 갖추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문은 정전의 ‘상시 응용 주의사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상시 응용 주의사항에는 ‘수양 정진’, ‘참회 반성’, ‘보은 봉공’의 일과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시 응용 주의사항을 물 흘러가듯이 매일매일 실천할 정도면 일과에서 힘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일과가 무너지면 반드시 동포 배은의 행위가 나온다는 효산 종사님의 법문을 읽으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포 은혜에 배은을 안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포 은혜에 보은하기 위한 ‘일과의 득력’에는 다음과 같은 표준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과에서 득력하기 위한 표준


저는 아직 일과로 득력하지 못한 수행자로서 다음과 같은 표준으로 일상을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첫째, 주어지는 일과 만나는 인연마다 우리의 무시선법에 따라 일심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결코 일로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바치면 좋은 인연도 함께 만날 수 있도록 법신불 진리께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일심과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일심과 정성을 기울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무시선이고 그렇게 쌓인 일심과 정성이 있어야 법신불의 큰 위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생활하다 보면 원근친소에 따라 내게 서운하게 대하는 인연들, 미운 마음이 생기는 인연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 그런 마음으로 괴로워질 때 예타원 종사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종사님께서는 ‘성품 자리에서 보라’고 딱 한 말씀하셨습니다. 성품 자리에서 보면 죄 주고 복 주는 위력은 나와 친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운 맘이 나는 그 사람, 나와 서먹한 그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불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속담이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바로 우리 불공법입니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지금 마주하는 이 인연에게 불공하는 것이 바로 동포 은혜에 보은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둘째, 계율에 청정해야 합니다. 옛말에 입은 복과 화가 드나드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단 한 번만 범해도 우리 본래 영성이 어두워져 버리기 때문에 두렵기 이를 데 없는 살도음(殺盜淫)의 계문은 죽기로써 범하지 말아야 하지만 말과 관련된 계율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급 6조 악한 말을 말며, 특신급 2조,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 7조 신용 없지 말며, 8조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말며, 법마상전급 5조 한 입으로 두 말하지 말며, 6조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는 이 계율을 가벼이 여기면 결코 동포에게 보은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일과의 득력은 꿈도 꿀 수 없게 됩니다. 주위 인연들이 호응하지 않는데 일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들의 과실을 말하고 평하는 세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불교의 수도인이라면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묻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교당의 교화도 살아납니다. 대산 종사께서 효산 조정근 종사를 교단의 공의에 의해 휘경학원에 파견하실 때 팔타원님께서 살아오신 삶, 그 분의 장단점, 실패의 원인 분석을 해주시기에 앞서 ‘우리 이제 천지 공사하자.’고 하셨습니다. 말로써 동포들과 기운을 막아버리는 그런 잘못은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응용에 무념한 자리이타 행을 해야 합니다. ‘나’라는 티끌을 가지고 취사를 하면 안 됩니다. 예타원 종사님의 법문 말씀처럼 모래알처럼 수없이 목숨을 바치되 바쳤다는 상이 없어야 하고, 흔적과 자취가 없어야 합니다. 물질을 베풀고 천하에 가득한 공을 쌓았더라도 행할 바를 행한 것일 뿐 베풀었다는 상이나 관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심결에 나온 귀종화상의 “한 티끌이 눈에 있으매 허공꽃이 요란하게 떨어지나니라.”라는 경계를 잘 새겨야 동포 보은을 위한 진정한 자리이타 행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돈암교당/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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