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로 비쳐주고 우로 베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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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로 비쳐주고 우로 베푸니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12.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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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정탁 교수의 세상읽기

“해와 달로 비쳐 주고 우로 베푸니 죽고 살고 못 면할 사 천지님 은혜…” 우리가 잘 아는 사은찬송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는 이 소절을 접할 때마다 이 가사를 지은 작사자에게 내심 감탄합니다. 해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또 달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이 함께 비추인다는 사실이 제 마음에 와 닫기 때문입니다. 노래 가사에 해와 달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지 모르지만 햇빛(日光)과 달빛(月光)의 동시 등장은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햇빛은 달빛에 가려지고, 달빛은 햇빛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저는 동서양 사상을 비교하는데 흥미를 느끼는데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의 차이는 ‘햇빛’과 ‘달빛’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서양은 ‘햇빛’에 입각한 철학이라면 동양은 ‘햇빛’과 ‘달빛’을 모두 아우르는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자들은 서양 사상의 근저에 흐르는 일관된 원칙을 ‘태양중심주의’라고 말합니다. 서양 사상은 태양(日)에 해당하는 절대적 존재를 가정하고 그 절대적 존재 하에서 인간과 사회를 규정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 등이 이런 태양중심주의의 산물입니다.


이에 반해 동양 사상은 햇빛뿐만 아니라 달빛도 중요시 여깁니다. 이런 중요성은 ‘civilization’을 문명(文明)이라고 번역한 말에서도 잘 들어납니다. 문명이라는 단어는 문(文)과 명(明)이 결합된 말로써 이를 풀이하면 ‘문자에 의해 밝아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밝아짐(明)은 ‘일(日)’과 ‘월(月)’의 합성어이기에(明=日+月) 해만의 밝음이거나 달만의 밝음이 아니라 해와 달의 함께한 밝음입니다. 따라서 인류 문명은 해의 밝음과 달의 밝음이 함께 조화를 이룬 결과물입니다. 해의 밝음에 의해 세상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낸다면 또 달의 밝음으로서 그 명명백백함을 가리는 것이 문명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러니 태양의 밝음으로만 세상을 설명하려는 태양중심주의적 사고와는 대조적입니다.


물론 서양사상이 태양의 밝음만을 견지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서양 사상은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명료화 하는 것을 으뜸의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높은 수준의 과학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원천도 따지고 보면 객관화와 명료화 추구의 결과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한 만유인력 법칙이 근대과학의 출발을 알렸는데 근대과학은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세상의 움직이는 원리를 모두 드러내어 객관화하고 명료화 한 작업들의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 논리적 사유가 제공되고, 그 논리적 사유의 출발은 ‘네(yes)’ ‘아니오(no)’ 식의 구분입니다. 이런 구분의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의 천지창조 신화에서 나오는 ‘선악과(善惡果)’ 이야기가 아닐까요?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세상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었다는 논리를 펴는데 이런 식의 세계관은 생성과 이어짐, 그리고 연결로 파악하는 노장의 자연관과는 너무나 판이합니다. 그런데 노장의 자연관이 우리들에게 더욱 익숙한 가치관입니다. 사계절만 하더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 겨울이라도 봄의 기운이 있고, 한 여름이라도 가을의 기운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입춘(立春)이, 한 봄에는 입하(立夏)가, 한 여름에도 입추(立秋)가, 한 가을에는 입동(立冬)이라는 절기가 각각 있는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도 생성과 이어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 사상은 서양 사상과 달리 두루뭉술한 듯싶습니다. 이런 두루뭉술한 태도는 천자문 시작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천자문은 ‘하늘 천(天), 따 지(地), 감을 현(玄), 누룰 황(黃)’으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하늘은 현(가물가물)하고 땅은 황하다(드러나다)(天地玄黃)”는 말입니다. 하늘이 가물 타는 것은 하늘엔 어떤 구분이 없어서입니다. 실제로 동쪽 하늘을 보아도 서쪽 하늘을 보아도 하늘엔 어떤 경계나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땅은 드러나 있습니다. 땅에는 바다도 있고, 육지도 있고, 산도 있고, 강도 있고,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해서입니다. 따라서 ‘황(黃)’은 드러나기에 ‘일광(日光)’과 연결된다면 ‘현(玄)’은 감추어지기에 ‘월광(月光)’과 연결됩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 몸에도 적용됩니다. 동양의학에선 우리 몸 내부를 가리켜 오장육부(五臟六腑)라고 총칭합니다. 그리고 오장에는 심장(心臟), 폐장(肺臟), 간장(肝臟), 비장(脾臟), 신장(腎臟)이 있고, 육부에는 위장(胃腸), 대장(大腸), 소장(小腸)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오장의 ‘장(臟)’ 자에 ‘월(月)’ 변이 있고, 육부의 ‘부(腑)’ 자에도 ‘월(月)’ 변이 있습니다. 게다가 오장의 각 부분들, 즉 폐장(‘肺’臟), 간장(‘肝’臟), 비장(‘脾’臟), 신장(‘腎’臟)에도, 또 육부의 위장(‘胃’腸)에도 ‘월(月)’ 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의학에서도 우리 몸 안을 ‘달’로 상징하고, 우리 몸 바깥을 ‘해’로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태양중심주의적 사고와 해와 달의 조화중심주의적 사고는 우주관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동양의 우주관은 해와 달의 조화 중심주의적 사고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것은 일원상서원문의 “… 유상(有常)으로 보면 상주불멸로 여여 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무상(無常)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노병사와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봅니다. ‘유상으로 보면’ 모든 변화가 드러나지 않기에 달 중심주의 사유에 입각한다면 ‘무상으로 보면’ 모든 변화가 드러나기에 해 중심주의 사유에 입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원상서원문은 그 둘의 조화를 제대로 이룬 텍스트인 셈이지요.


원남교당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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