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품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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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품 공화국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1.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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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겨레학교 최영미의 열아홉, 다시 살아가기 2

11월이다. 애써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미련 없이 정든 나무를 떠난다. 이때가 되면 북쪽 내가 살던 청진에선 바짝 마른 낙엽을 태우느라 군데군데 불 무지가 모여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학생들이 밤새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 모아야 했는데, 가뜩이나 쌀쌀한 기운에 귀찮기만 한 아이들의 볼은 한껏 부어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대며 마지못해 쓰는 체 하다가도 또래 애들이랑 부대끼며 노느라 아이들은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튼 누런 낙엽은 곧 들이닥칠 추위를 밉살스럽게 한발 앞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요즘 낙엽을 보면 나에겐 온갖 잡생각이 떠오른다. 어느 소설책에서 읽은 글줄 속의 낙엽을 그려보며 슬픈 분위기도 잡아본다. 내가 나만의 감정에 푹 빠져 있을 때 멀리 내 고향의 친구들은 뭘 하고 있을까…. 나처럼 낙엽을 보며 행복한 슬픔에 빠져 있을까, 아니면 어릴 때처럼 마당을 어지럽히는 나뭇잎을 귀찮아하며 마구 쓸어낼까…. 혹시 그들도 낙엽을 보며 짜개바지동창이던 나를 추억하고 있을까….


아! 여기 남한에서는 짜개바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북한에선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애들에게 가운데를 깁지 않은 바지를 입힌다. 이렇게 가운데가 찢어졌다 하여 짜개바지라고 하는데 내가 ‘동창’이라고 한건 그만큼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짜개바지가 편하긴 했다. 오줌이 마려우면 옷을 내리지 않고도 바로 볼 일을 볼 수 있고 잡다한 집안 일에 시달리는 엄마들에게도 참 괜찮은 것이었다. 근데 이게 여름엔 참 좋은데 겨울엔 가랑이가 썰렁한 것이 단점이다. 여기 남한에서 애들이 일회용 기저귀를 쓰는 걸 보고 어머니들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여기서 태어났으면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내지 않아도 됐을 걸….


일회용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한국은 어딜 가나 일회용품으로 가득하다. 하나원을 퇴소하고 뭘 모를 때 누가 타 주는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는 다 마시고 난 컵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 씻어서 다시 써도 될 것 같아서 후엔 내가 커피나 차를 마신 컵은 씻어서 세 번은 더 쓰곤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선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서 버리긴 했지만 알루미늄 냄비를 모래로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쓰던 북한의 생활습관이 배인 나로선 깨름한 일이었다.


일회용품이 땅속에서 분해되는 데는 수십 년, 어떤 건 백년 훌쩍 넘게 걸린다고 한다. 때가 되면 말없이 땅으로 내려앉아 대지를 비옥하게 하는 낙엽과는 너무 다르다. 어릴 적 귀찮기만 하던 낙엽이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조금씩 여기 한국에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나름대로 일회용품이요, 낙엽이요 하면서 좋고 나쁘고를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내기로 이 땅에 뿌리 내리는 내 가슴이 일회용품이 아닌 푸근한 낙엽만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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