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교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자
상태바
재중교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2.26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장의신 교무의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국에도 경인년 새해가 밝았다. 이번 경인년은 60년 만에 돌아오는 백 호랑이 해라 하여 출산을 준비 중인 부부들에 관심을 받았다. 호랑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로서 특히 백두산 호랑이는 한국의 기상을 표현한다.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이자 한민족의 근원으로 내가 이번 인사이동으로 새로 부임한 중국 연변(연변 조선족 자치주)은 바로 백두산과 함께 우리 민족이 살아 숨 쉬던 곳이다.


나는 10년 전 이곳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10년 전에는 같은 조선말도 통하지 않아 애를 먹은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한국 방송의 영향으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며 음식문화도 한국의 식습관으로 변하여 음식 맛이 한국에서 먹는 것과 별반차이가 없게 되었다. 또한 거리를 걸으면 한국 노래가 흘러나와 한국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착각을 할 때가 많아 친밀감이 든다.


다만, 우리가 한민족으로 알고 있는 조선족은 조선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참으로 슬픈 역사의 한 토막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하자면 원래 간도(間島)는 ‘사이섬’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청나라와 조선을 가로 흘렀던 두만강 사이에 있던 섬을 ‘사이섬’이라 불렀다. 그래서 사이섬 북쪽지역을 북간도라 한 것이 유래가 되어 연변지역을 ‘북간도’라 하였다. 이곳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생존을 위해 척박한 땅을 개간하였으며 때로는 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살렸다.


이렇게 우리의 숨결이 살아있던 북간도가 연변 조선족자치주로 바뀌게 된 것은 1953년 중국과 북한의 비자(visa)법에 의해 지역과 민족의 구분이 명확해 졌다. 그래서 중국에 남아있던 조선인을 조선족이라 하여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중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슬픈 근대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을 찾아 왔고, 그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연변은 큰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그에 따른 사회적인 병폐현상도 드러났다. 해외 돈벌이에 나섰던 많은 가정이 이혼을 하였고, 또한 부모의 부재로 인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가 지금은 청소년 문제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북간도로 월경(越境)한 것이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이었다면, 현재는 자녀의 교육과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외로 또 다른 월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만일 현대와 같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 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연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북간도를 지키고 일구었던 선조들의 정신은 이미 사라졌고 한국어를 하는 중국인으로 전락했으며 물질을 쫓아 해외로 떠나는 물질 만능의 도시가 되었다. 이에 경인년 호랑이해를 맞이하여 백두산 호랑이의 기상을 되살리고 선조들이 지켜내려 했던 민족의 정신과 한민족의 근원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선조들은 세상을 떠났고 지금에 동포들과 청소년들이 크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부터 조선족이 아닌 재중교포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며 이곳의 청소년들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다각적인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연변은 중국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연변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깊이 이해하고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성도교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