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결집 주역이자 일원문학의 마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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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서 결집 주역이자 일원문학의 마중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3.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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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경식 교도의 내가 본 선진 11 / 범산 이공전 편



내가 범산凡山 이공전李空田 교무님을 처음 뵌 것은 늦어도 1963년 무렵 서울교당에서였을 것이다. 교우회 문예부장으로 있던 처지에 회지를 내면서 표지 제자題字에 붓으로 ‘원우圓友’란 글씨를 교무님께 부탁했던 일이 가장 확실한 기억이다. 삭발한 머리에 일원상처럼 동그란 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이목구비에 안경과 이름조차도 모두 동글동글하시었다. 인품은 또 얼마나 둥그신지 모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려도 찾지 못하는 분이니, 나는 원불교에서 가장 잘 쓰는 ‘원만구족’이란 말의 살아 있는 현현顯現인 듯 느꼈다.


당시 법회마다 부르던 교우회가(성가 22장)는 곡도 좋지만 「깊고도 도타운 영산의 옛 인연 어울려 또 여기 우리들 모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그 노랫말이 좋았는데 그것을 지은 분이 범산님이었다. 문학도였던 나는 범산님이 남달리 보였다. 그 무렵 <원광>은 월간도 계간도 아니고 무슨 무크지처럼 잊을 만하면 나왔는데, 거기에 실렸던 범산 님의 시 「하섬 새벽 별은/씻긴 듯 영롱하다//불타가야 숲 사이로/그 별빛도 저랬던가//해마다 아쉬운 별아/ 내게는 언제 그 별이 될래」(원광 44, 하도 성도절)란 작품이 참 매혹적이었다. 나도 덩달아 <원광>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종교계>나 일간지 등에도 종교적 주제의 글을 실었다.


한번은 성가 가사 모집이 대대적으로 있었는데 수십 편을 써서 응모하였더니 겨우 두 작품이 뽑혔다. 적이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범산님의 손질을 거쳐서야 채택되었지만 분수 모르고 우쭐거리던 시절 얘기로, 생각하면 지금도 절로 미소 짓게 된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훗날에도 범산님은 나를 만나면 성가 가사를 지어보라고 권유하셨는데 그 당부를 받들 만큼 역량을 쌓지도 못하고 실적도 없어서 부끄럽다.


이렇다 할 학력學歷도 없고 체계적 문학수업도 받을 기회가 없으련만 시가며 문장이며 어찌 그렇게 탁월한 능력을 갖출 수 있었는지 수수께끼다.


“어른들이 전부터 그러셨었지. 내가 정산 종사 할아버지 되시는 송훈동 어르신의 후신이라고. 그분이 정산 종사 따라 영산으로 오셨잖은가.”


글쎄, 그 어른이 닦은 학문을 오롯이 받아 나오셔서 생이지지하셨는가는 모를 일이로되, 송 아무개 교무님이 또 구산 송벽조 선진의 후신이라고도 하니, 결국 혈연이든 법연이든 이 회상에 와서 살다가 가고는 때맞추어 다시 모이기를 거듭하는가 싶다. 범산님의 시 <운수의 정>처럼 ‘3천년을 더듬는 영산회상 운형수제’가 실감나지 않는가.


어쨌건 내가 원불교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했던 에너지의 상당량이 범산 님의 자극으로부터 온 것은 틀림없을 듯하다. 그래서 대종사 탄신 100돌 기념으로 《소태산박중빈의 문학세계》를 낼 때 나는 두 번도 생각지 않고 범산님께 서문을 부탁드렸었다.


1987년 범산님은 당신의 글을 모아 《범범록凡凡錄》이란 이름으로 문집을 내셨다. 그 중에는 젊은 날에 쓴 일기, 지인들에게서 받은 편지 등도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일기문 가운데 나의 주목을 끄는 것이 있었다. 「원기 39년 11월 4일. 삼타원 최도화 선생, 자택에서 참혹한 열반.」 박사시화, 장적조 두 분과 더불어 3대 여걸로 칭송받던 최도화 대호법, 71세 노령에 참혹하게 살해된 삼타원의 열반은 충격적이었다. 미륵사 계시던 정산 종사를 남 먼저 알아보아 섬겼고, 대종사님 서울 교화의 길을 닦고 박사시화, 성성원 등을 끌어들였으며, 전음광 일가와 대산 종사 일가의 입교 연원이 된 분이기도 하니 그 공덕이 얼마나 큰가. 진안, 전주, 마령, 좌포 주무를 하면서 319명을 입교시킨 기록도 가진 여장부이시다. 정산 종사께서도 ‘전북회상과 서울회상의 총연원’으로 평가한 어른이 아니던가. 이런 공덕에도 불고하고 참혹한 죽음을 맞다니 인과가 있긴 있는 것인가?


총부 건설의 최대 후원자 서중안 대호법은 잘 나가던 한의원이 화재로 폭삭 망했고 그나마 양자에게 배신당하는 등 말년이 불운했다. 대종사의 제생의세 경륜을 펼치는 데 최대 공로자요 여래위에 오르신 정산 종사는 어찌하여 말년 9년을 병석에서 혹독한 시련을 안고 사셔야 했던가. 대종사님께 그리도 신성을 다 바친 구타원과 팔타원은 왜 젊은 나이에 아들 둘을 혹은 외아들을 잃는 불운을 당해야 했던가. 어찌 이들뿐이랴. 원불교 만나 정신, 육신, 물질로 공덕을 쌓은 교도들이 가지가지 불행을 겪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은 왜냐. 복지으라고 꼬드기는 말은 다 교세를 부풀리기 위한 감언이설이더란 말인가. 기독교 구약에도 그런 의문을 다룬 <욥기>라는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이제나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신도들의 이유 있는 항의에 시달리며 그들을 달랠 논리를 개발하느라고 꽤나 고심했던 모양이다.




“종사님, 전부터 궁금했는데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뭔데?”


“범범록에 보면 삼타원 최도화 할머니가 참혹한 열반을 당하셨다 했는데, 왜 어떻게 참혹했습니까?”


“아, 그거! 정산 종사님이 내리신 향촉을 받들고 가봉께 흉기에 여러 번 찔려서 시신이 끔찍하더란 말이야.”


“누가 왜 그랬을까요?”


“그 어른이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 살고 있었는데 강도가 들었던 거라.”


범산님은 지나가는 말투로 당신이 유추한 바를 말씀하셨다. 삼타원의 성격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는 것, 가족과 사이가 덜 좋아 따로 사신 것도 그렇거니와 강도가 들면 가져가고 싶은 것 가져가게 내버려 두면 될 것을 그 성미에 고분고분 내주지 않았을 것이란 것, 저항이 완강하다 보니 당황한 강도가 수없이 난자하는 짓을 저질렀을 것이란 얘기다.


그 성격이니까 그만한 공로를 세웠거니와 또 그 성격이니까 그렇게 죽지 않을 수 없는 것,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것도 진리다. 물론 정업이야 따로 있었겠지만 말이다. 대종사께서 “부처님의 능력으로도 정업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하셨지만, 복과 죄가 상쇄되지 않는다는 것,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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