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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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신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4.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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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성하 교무의 미국교화 이야기

가끔 교당에 전화를 하거나 불쑥 나타나시는 천주교 신자 분이 있습니다. 동네 한인신문에 썼던 칼럼을 보고 저를 찾아온 분이었는데, “콜로라도에는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동안 답답했는데 교무님과는 말이 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백만의 콜로라도 인구 중에 선택받은 단 한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은이 망극할 일이지요. 자기 교회 신부님과도 안통하는 말이 저와 무슨 수로 통했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 분과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도대체 저 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말이 통한다는 것은 그 분의 견해시니까 말릴 의사는 없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당연히 짐작은 갑니다. 그 분은 아마도 본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와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높은 관심, 그 부분을 자기 교회에서는 터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신부님께 말씀드리기는 인간적으로 죄송하기도 할테구요.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런 의심과 회의주의적인 신앙 태도를, 그것도 일이년 신자도 아닌 사람이 이제와서 내비칠 수 있었을까요? 신앙에 대한 회의나 하나님에 대한 불경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는, 심지어는 점검조차 없는 맹목적 신앙을 오히려 더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원불교 교무 앞에서야 하고 싶은 말을 가릴 필요가 없었겠지요. 아마 그래서 제가 사백만 분의 일, 말이 통하는 유일자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 주 법회 후에 자기 교회의 예배를 마친 이 분께서 잠시 교당에 들르셨던가 봅니다. 저는 교당의 어린이들과 영화 관람을 약속해 놓아서 어린이 부대와 더불어 영화를 관람하는 중이었습니다. 극장을 나오자 부재중 전화까지 와 있어서 연락을 하였더니 저의 한국 다녀온 안부와 본인의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분과의 대화는 늘 형이상학적이어서, 사실 골치가 아프고, 이 회화가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 직업에 대체 어떠한 도움이 되는 회화인가 하고 삐딱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제가 그 분께 이런 신앙적 질문과 본인의 일상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 묻곤 합니다. 저는 그야말로 실용적 마음 공부인입니다. 모든 공부는 마음속으로 부터 시작하여 머리를 거쳐 눈 코 입 귀 손과 발로 나와 현실에서 작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경영하는 세탁소도 상황이 좋지 않을 터인데, 내 일상의 먹고 사는 것, 아이들 육아, 부부관계, 인간관계에서 서로 말도 안통하면서 대체 공부를 어디서 찾는다는 것인지 저로선 모르겠습니다.


왠 일로 사는 이야기를 하시길래, 얘길 나누던 끝에 제가, “그래야지요, 저도 정신을 딱 챙기고, 마음을 먹고 살아야지요.” 하니까 그럽니다. “마음 먹고 정신 챙기는 것은 저희들이나 하는 것이지, 교무님들이 마음을 먹고, 챙기시고… 뭘 그러셔요.” 정말 입이 다물어집니다. 그래요, 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요. 제가 날개를 숨겨서 못보신거죠? 교무가 설마 사람이겠어요? 삼세의 제불제성도 여전히 공부중인 이 마당에 이 무슨 불경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부의 신이었나 봅니다. 괭이를 든 농부도, 마치를 든 공장도, 주판을 든 점원도, 정사를 잡은 관리도, 모두 다 그 자리서 공부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선 그 자리가 공부길이기 때문입니다. 목탁을 든 교무도 지금 정신 딱 챙기고, 마음을 먹으면서 이 자리서 공부 중입니다.


콜로라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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