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방편으로 교화하신 자비로운 불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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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방편으로 교화하신 자비로운 불보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7.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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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경식 교도의 틈새 선진열전 14 / 법타원 김이현 편

내가 법타원 김이현 종사님을 처음 뵌 것은 아마 원기 56년(1971) 무렵이었을 것이다. 처음 뵌 얼굴은 펀펀 넓적하여 별로 애교 있거나 세련돼 보이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자비롭고 목소리는 부드러워 세상 누구라도 보듬어 안을 듯한 분이었다. 당시 법타원님은 안양교당을 일구어 후진에 인계하고 수원 개척에 나선 처지였다. 수원시 고등동 여염집에 원불교 간판을 달고, 대청마루에 붙은 안방과 건넌방의 장지문을 터놓고 법회를 보았는데 초창교당 치고도 참 초라했다. 무슨 무당집쯤으로 알았는지 한번은 전도부인들이 막무가내로 들어와 예수 믿으라고 강권하더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 사람들 참 예의를 너무 모르더군! 내가 교회 찾아가서 목사님한테 원불교 믿으라고 떼쓰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 웃기는 하셨지만 꽤나 난감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법타원님의 인품과 법력은 입소문으로 동네방네 알려져 예횟날이면 장소가 비좁아 고충을 겪을 만큼 교세가 불어났다. 나는 그때 평택에 있으면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한 번은 법회를 끝내고 버스를 타러 가던 길에 함께 법회를 본 분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여자 중노인이었는데 그 분은 내게 이런 하소연을 했다. “난 천주교를 오래 믿은 사람입니다. 그동안 교무님 인품이 좋고 법설이 좋아서 원불교에 다녔는데 아무래도 다시 성당으로 가야 할까 봐요.” “교무님 인품이나 법설이 좋다면서 왜 그러십니까?” “신앙이란 게 그게 아닙디다. 법회에 나올 때마다 하느님한테 죄송하고, 꼭 무슨 천벌이라도 내릴 것처럼 불안한데 어쩌겠어요?” “……”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천주교가 원불교보다 열등하다거나 철지난 종교라고 설득하려 든다면 이거야말로 이웃 종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는 종교와 신앙의 개념이 혼란스러웠다. 그러잖아도 나는 이미 신앙문과 수행문을 놓고 종종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내가 가진 과학적 지식은 사후의 세상이라든가 기도의 위력이라든가 하는 데 끝없이 의문을 갖게 했다. 저런 부인네들을 홀려서 사후를 대비해 면죄부를 팔고 천국행 티켓을 파는 것이 신앙 아닐까. 착하고 바르게 살라든가, 인격을 닦아서 진정한 행복을 얻자든가, 그런 수행 차원에서라면 좋다. 그러나 신앙이란 것은 비과학이요 미신과 오십보백보 아닌가? 이 무렵 나는 유명한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같은 책을 탐독하며 종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불공이니 기도니 하는 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교무님들이라고 과연 불가사의한 진리의 위력을 믿기는 하는 걸까? 법타원님은 진짜로 믿는 듯했다. 그런데 별로 합리적인 것 같지가 않았다. 큰 교당 마련하는 방법으로, 흉가를 싸게 사들여서 해코지하는 귀신을 천도하고 새 집을 지을 궁리를 하시는 꿍꿍이(?)가 엿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을 해서 보여 드렸더니 풍수쟁이처럼 좌향을 보고 어쩌고 하시더니 남쪽이 막혔으니 거기다 창호를 내야 가족이 좋을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기도 하셨다. 계조모가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재를 모시는데 향로 위에다 소지(燒紙)를 하여 재를 공중으로 날리면서 중얼중얼하시더니, 할머니 영가가 착심 없이 떠났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셨다.


하긴 계조모가 자식도 친척도 없이 떠돌던 홀가분한 분이니 이승에 집착을 둘 것이 없긴 했다. 또, 편지로까지 채근하시는 바람에 벽을 터서 남쪽으로 창호를 내니 밝은 빛이 들어오고 통풍도 잘 되어 안방은 물론 마루까지 쾌적해진 것도 맞다. 그리고 수원교당이 고등동 작은 민가를 팔고 교동 지금의 명당자리로 옮겨온 것은 또 뭐냐. 그 집은 군 고급장교가 목매달아 죽은 흉가라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싸구려로 사들이고 그 자리에 지은 것이니 그것도 적중했다.


1975년 다섯 살짜리 작은 아들이, 제 엄마가 끓는 물을 방금 퍼놓은 큰 대야에 텀벙 빠지는 끔찍한 사고가 터졌다. 병원에선 화상 부위가 너무 넓어 사흘 안에 쇼크사를 면치 못할 것이라 했다. 눈, 코, 입만 빼고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았는데 벗겨진 피부에서 끝없이 진물이 흘러나와 붕대를 적셨다. 병원에 들어선 나를 보자 아버지를 부르며 애처롭게 울부짖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찢어졌다. 자식을 낳은 것, 결혼한 것까지 후회가 되었다. 누가 시켰으랴만, 집에 돌아온 나는 사흘 동안 물만 먹으며 기도했다. 내 수명을 덜어서라도, 아니 내 생명과 바꿔서라도 그 애를 살려 주소서. 매일 천 배를 하고 독경을 하면서 절절히 빌었다.


겉으로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나는 종일 가슴으로 울었고 꿈에서도 울었다. 집에서 병원으로 가면서는 그 사이에 죽지 않았을까 두려움에 떨었고, 병원에서 집으로 오면서는 죽은 애를 포대기에 싸서 대문을 들어서는 상상을 백번 천번 하면서 치를 떨었다. 사흘째 기도를 드리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벗겨진 피부로 흐르던 체액이 드디어 소변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변을 보니 이제 살았다는 것이다. 화상은 놀랄 정도로 빨리 회복이 되어갔고, 일주일 만에 퇴원시킬 수 있었다.


신앙이 없으면 윤리나 철학은 될지언정 종교가 아니다. 신앙은 기도의 위력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기도의 위력은 결코 거저 오지 않는다. 일백 골절이 다 힘이 쓰이고 일천 정성이 다 사무쳐야 된다.(교의품 16) 그나마도 어떤 것은 지칠 만큼 참으며 때를 기다려야 온다.




묵은 서류를 뒤적이다 보니 법타원 님이 주신 법문 서신이 있다. 봉래수양원(변산 원광선원)에서 보내신 것인데, 편지 끝에 날짜도 안 적으시었고 우체국 소인에서도 날짜 확인이 안 된다. 어쩌면 법문의 유효기간이 아직 남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법문의 골자인즉 증산 선생의 말씀을 옮기고 부연하신 거다.




惡將除去無非草


싫다고 베어 버리려면 풀 아닌 게 없고


好取看來總是花


좋다고 보아 취하려니 모두가 꽃이로다.




남의 단점을 잘 지적하여 비판하기 좋아하면 항마위에 그치니, 장점을 보고 상생상화할 줄 아는 것이 출가위 심법이란 지적이시다. 늘 잊지는 않고 있지만, 언제 보아도 가슴이 뜨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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