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한다고 굶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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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한다고 굶기지 마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10.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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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야기로 만나는 선진



봄은 게으르고 여름은 더디 와도, 겨울이란 놈은 어느 날 눈 떠보면 이미 제 세상이다. 손발이 얼어터지는 혹독한 계절이라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나 겨우 외투 덮던 시절, 그 마저도 없던 사람들은 종종 생불님을 찾아 영산이나 익산을 찾아 왔다. 살아있는 부처님이니 그저 죽게 두진 않을거라는 생각이었다. 오십리 백리 언 땅을 맨발로 밟고 와 더러는 오자마자 쓰러지기도 했던 그들을, 대종사는 한없는 자비로 보듬어주었다.




“이를 어째쓰까. 그 집구석엔 누말짜꼬로 먹고 죽을 보리쌀 한톨도 없을텐디. 새댁이 배가 불러 왠일로 몸이 난다 싶었는디, 알고봉께 새벽녁에 몸을 풀었다는구만.”


“근디 뱃속서 탁 빼고 낭께 얼라가 쪼글쪼글 쬐깨낳대여. 근데도 새댁도 먹지를 못혀서 바득바득 빨아봐야 빈 젖이디야.”


“아이고, 애먼 얼라 하나 잡겄네잉. 우째쓰까, 이를 어째까이.”


가까운 마을의 산모가 아이와 함께 굶고 있다는 이야기는 대종사에게까지 닿았다. 대종사는 조용히 제자들을 불러 쌀밥과 미역국을 마련해 산모 집에 보내라 일렀다. 세상의 몸 굶고 마음 굶는 이도 다 배불리고 마음 불려야 할진대, 한나절이면 오가는 가까운 이웃이라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 뒤에는 또 장작으로 다듬은 나무 몇 짐을 갖다 주기도 했다.


때는 신문물이며 각종 기계들이 밀물처럼 밀려들 때였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뎠다. 서울에는 택시가 날로 늘었지만 지방엔 인력거가 한창이었다. 한번은 대종사가 인력거를 탔는데, “어이구, 선생님은 몸이 부대하시니 삯을 더 주셔야겠는데요”라며 인력거꾼이 투덜투덜댔다. 미리 합의한 삯과 다르다거나 버릇이 없다며 성내는 법 없이 대종사는 곧 바로 “아 그런가? 내가 무거워서 자네가 힘이 드네, 그려”라며 미안함과 측은함에 그저 멋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결국 요구하는 만큼 더 치른 대종사는 “인력거꾼이 땀 흘리며 숨 가빠하는 걸 보니 내 앉은 자리가 다 불편하다”며 이후 되도록 인력거를 타지 않으려 했다. 일정한 값을 주고 받음에 그래도 되는 관계이건만, 그보다도 대종사는 직접 마주한 측은지심을 쉬이 지울 수는 없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화두 삼은 것에 대해서는 한 기준을 잡아내는 스승의 모습에, 많은 제자들이 체를 잡고 훈련하곤 했다.


대종사의 자비는 너그럽고도 명료했다. 긴 말 대신 마음에 확 번지는 한마디 이치가 전부였다. 평소 제자들의 근황을 챙기는 데도 “어찌 지내냐?” 툭 던지고는 돌아오는 대답 한마디로 모든 것을 꿰뚫었다. 한번은 제자들이 집에서 기른 가축이며 산과 들의 짐승들을 대하는 것을 본 대종사가 말했다.


“짐승들에게 밥 많이 줘라. 말 못한다고 굶주리게 하지 말아라.”


저들도 다 생명이 있고 뜻이 있으며 사람 말이 아닌 것 뿐이지,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이다. 한낱 금수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던 가축의 죽음에도 대종사는 따로 재비를 챙기며 ‘천도재를 잘 지내주라’고 했다.


편히 키우던 개의 죽음에도 천도재를 지낸 이 일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어, 이후 정산종사, 대산종사는 물론 특히 미물까지도 아끼고 보살피며 자기 것 주기를 좋아했던 육타원 이동진화와 혼자로는 먹는 법 갖는 법 없이 모두의 것으로 돌린 응산 이완철에게 귀감이 되었다.


정리 민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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