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설봉 화상에게 물었습니다.
“그물을 찢고 나온 물고기는 무엇을 미끼로 해서 잡아야 합니까?”
“그대가 그물을 찢고 나오면 알려 주겠다.”
“일천 오백 대중을 거느리시는 화상께서 말머리도 알아듣지 못하십니까?”
“노승이 절 일에 바쁘다보니….”
노자 도덕경 제73장에 보면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하늘그물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라서 탁 트여 모든 것을 통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놓치지도 아니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잘 짜여 진 그물과 같아서 죄를 짓고서는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평생을 이 그물 속에서 살면서 하늘을 속이려 들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명심보감 천명편(天命篇)에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획죄어천(獲罪於天)이면 무소도야(無所禱也라’ 즉,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 성인들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이 어쩌면 똑 같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한 가지가 아닐 런지요?
그러면 우리 수도인이 이 그물에서 벗어난 금물고기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한 마디로 이 그물을 찢고 나올 수 있는 깨달음과 법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평범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범부로서는 한치 앞도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습니다. 일반 도량형으로는 잴 수 없는 사람(過量底人) 정도의 그릇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옛날 부산 선암사에 혜월(慧月)이라는 스님이 계셨답니다. 평소 많은 전답을 개간하셨는데,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의 꼬임에 빠져 논 서 마지기를 두 마지기 값만 받고 팔았습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스님에게 해약을 하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혜월 스님께서 한 마디 하셨답니다.
“자네들의 계산법이 참 이상하네. 두 마지기 값을 받고도 논 서 마지기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남는 장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논이야 누가 경작을 하던 그대로 있는 것이니, 당신의 계산법으로는 두 마지기 값을 벌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 혜월 스님의 계산법은 세속적 잣대로는 잴 수 없는 큰 도량입니다.
우리 원불교 대종경 불지품의 23장 전체가 새 부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 범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언행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한 장 한 장이 범부의 생각으로는 계산이 안 되는 셈법이지요. 그 중 제 20장을 예로 들어봅니다.
새 부처님께서 하루는 조송광과 전음광을 데리시고 교외 남중리에 산책을 하시는데 길가의 큰 소나무 몇 주가 심히 아름다운지라 송광이 말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워라, 이 솔이여! 우리 교당으로 옮기었으면 좋겠도다.’하거늘, 새 부처님 들으시고 말씀 하시기를 ‘그대는 어찌 좁은 생각과 작은 자리를 뛰어나지 못하였는가. 교당이 노송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노송이 교당을 떠나지 아니하여 노송과 교당이 모두 우리 울안에 있거늘 기어이 옮겨놓고 보아야만 할 것이 무엇이리요. 그것은 그대가 아직 차별과 간격을 초월하여 큰 우주의 본가를 발견하지 못한 연고니라.’하셨습니다. 참으로 큰 우주의 본가를 내 집으로 삼고 사시는 대자유인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고기가 그물을 찢고 나올 정도면 보통의 물고기가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금빛 물고기(金鱗)는 실제로 그런 물고기가 있다는 뜻은 아니죠. 일체의 번뇌와 망상, 생사와 속박, 애증과 갈등의 그물을 찢어버린 대원정각(大圓正覺)의 부처님, 대 자유인을 상징한 말일 것입니다.
옛 선사가 송(頌)하시기를 「그물을 찢는 황금빛 물고기/ 물속에 조용히 있을 리 없다 / 하늘을 흔들고 땅을 휘저으며/ 지느러미를 떨치고 꼬리를 흔드네 / 고래가 뿜는 파도는 천 길이나 날고/ 우레 소리 진동하니 회오리바람 인다 / 이 호쾌한 소식을 아는 이 몇이나 될지.」라 하셨습니다.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북을 찢고 깃발을 빼앗으며, 백 천 겹의 포위망을 빠져나오고 호랑이 머리에 올라타서 꼬리를 잡는 솜씨가 있더라도 아직 선지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군요, 아! 언제나 진리를 깨달아 그물을 찢고 나오는 금린(金鱗)이 될 수 있을 런지 아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