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과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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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과 신자유주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3.2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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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류법인 교도의 모스크바의 창

봄이다. 영하 10도의 날씨와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봄이다. 잿빛구름을 제치고 어쩌다 한번 씩 햇살이 반짝일지라도 봄은 봄이다. 삼월이니까.


러시아는 2월 28일부터 일주일간 봄맞이 축제인 마슬렌니짜 기간이다. 마슬렌니짜는 러시아 전통명절인데, 예전 농경시절 우리네 설날과 대보름 기간 인근 동네사람들까지 함께 모여 즐겼던 공동체축제와 비슷하다. 전통적으로 고대 러시아인들은 이 기간 동안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하는 허수아비 태우기, 인근 마을의 처녀총각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원무를 추며 밤새워 놀기, 태양을 상징하는 불린(우리네 부침개와 비슷하다)를 구워 먹으며 온 동네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잔치를 벌였다.


10세기 정교를 받아들이면서 민간 신앙과 이교도적인 요소를 담은 전통을 몽땅 없애버렸던 러시아 정교회도 이 명절만은 인정해서 마슬렌니짜 기간 일주일동안 ‘어린양’들이 벌이는 광란의 축제를 눈감아주었다. 대신 이 마슬렌니짜 주간 바로 뒤로 부활주일 전 40일간을 경건과 구제와 봉사로써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을 생활화시켰다.


올해는 그 마슬렌니짜와 3월 8일 여성의 날이 공교롭게 연달아 이어지면서 3일간의 연휴가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세계 여성의 날은 1857년과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근로여성의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런데 생명의 원천인 태양을 숭배하며 공동체 정신을 고취시켰던 고대루씨의 마슬렌니짜와 여성의 지위향상을 요구하며 제정되었던 여성의 날이 21세기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극도의 소비 광풍을 만들어냈다. 여성에게 바칠 꽃값은 평소의 서너 배로 뛰어버렸고, 극장가, 여행사, 레스토랑과 금은방 화장품가게 할 것 없이 각종 이벤트성 상품을 출시해 그야말로 특수를 누리고 있다. 자기 여자에게 그럴싸한 선물을 못해주는 남자가 자괴감을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다. 식구들끼리 큼지막한 전(블린)을 부쳐 잼이며 스메따나(우유의 지방성분), 고기 볶은 것을 싸서 먹고 꽃 한 송이를 선물하던 소박한 명절이 어느새 아주 화려해지고 상업화되었다.


이 마슬렌니짜 기간이 지나면 러시아 사람들은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 고기류는 물론 유제품, 생선, 달걀까지 먹지 않고 채식을 고집할 것이고, 식당에서도 채식위주의 메뉴를 내놓을 것이다. 또 그 사순절이 끝나면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 대청소를 하고 부활절 달걀 물들이기와 부활절 빵을 만들 것이다. 소비에트 시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넘어가던 것들이 언론의 자세한 보도와 대대적인 선도로(?) 불과 10여년 만에 안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자본의 상술까지 합세하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정교나 러시아 전통과는 별 관계가 없는 나까지도 다른 친구네는 다 하는데 왜 우리는 그런 것 안하느냐는 아이들의 성화에 때가되면 블린을 굽고, 부활절 빵을 만들고 달걀을 물들여 정교사제가 뿌려주는 성수축수를 받기 위해 교회 앞에서 줄을 서곤 한다. ‘러시아 추억 만들기’의 일환으로 가볍게 생각하며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습관처럼 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내가 러시아 사회에 물들어 감을 느낀다. 여성의 날 원래 취지를 설명해줘도 그것은 뒷전이고 친구들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고 싶으니 이달엔 용돈을 더 많이 줘야 한다고 협상하는 내 딸들 역시 러시아 사회에 물이 들어버렸다.


하기사 값비싼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을 고귀하다고 생각하고 성과, 속도, 효율, 경쟁을 요구하는 일들이 어찌 이 러시아만의 문제이랴! 좋은 취지의 전통들마저 신자유주의 하에서 돈벌이로 전락해 버리는 러시아 현실을 보면서 존재자체의 소중함,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풍토가 조성되기를 바라본다. 우리들이 아름다운 사회에 물들여진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모스크바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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