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와 무시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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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와 무시선법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5.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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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13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정전 무시선법



우리 원불교가 자랑하는 수행대법(修行大法)인 ‘무시선법’ 가운데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위와 같이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참 성품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나툴 수 있고, 그대로 지킬 수 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이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중생이 고(苦)를 벗어나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방법이 있으니,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것은 바른 수행의 길을 여덟 가지로 말씀해주신 것으로써 다음과 같습니다.


정견(正見: 바르게 봄),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함), 정어(正語: 바르게 말함),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함), 정명(正命: 바르게 삶),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정진함),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있음), 정정(正定: 바르게 수행함).


그래서 이를 보면 우리 원불교수행인은 무시선을 닦고, 불교수행자는 팔정도를 닦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 만약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 그대로 ‘무시선법’을 닦는다면, 우리의 수행법이 저 팔정도의 덕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스스로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즉, 불교의 팔정도는 낱으로 보면 여덟 가지의 수행길이지만, 전체로 보면 우리 ‘무시선법’의 수행결과로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무시선법’의 가르침을 따라서 바깥경계에 대해 분별주착하지 않고, 또 마음 안에서 모든 잡념망상을 쉬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첫째, 사물을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그 참모습 그대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곧 바르게 봄[正見]입니다. 둘째, 자성의 혜가 솟아서 시비선악, 염정미추에 끌림이 없는 바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곧 바르게 생각함[正思惟]입니다. 그리고 셋째, 무엇을 말하거나 진실 되어 저절로 거짓됨을 찾을 수 없게 되니 이것이 곧 바르게 말함[正語]이며, 넷째 바른 지혜로써 일체의 행위에 조금도 삿됨이 없게 되니 이것이 바르게 행동함[正業]이고, 다섯째 자성의 혜가 두렷하면 저절로 삼독(三毒)에 물듦이 없어서 삶이 조금도 삿됨이 없으니 이것이 바르게 삶[正命]이요, 여섯째 이 수행은 우리의 참다운 자성에 늘 그대로 머무는 것이라 이것이 바르게 정진함[正精進]이며, 일곱째 이 수행은 마음이 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끌림이 없어서 항상 고요하고 맑으니 이것이 바르게 깨어있음[正念]이고, 마지막으로 이 수행은 위와 같이 자성의 정혜계가 동시에 살아있어서, 늘 안팎으로 두렷이 밝으니 이것이 바른 선정[正定]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시선법’은 불교의 팔정도의 덕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게 하고, 필경에는 “일체 법을 행하되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고, 진세(塵世)에 처하되 항상 백천 삼매를 얻어서” 「생사자유와 윤회해탈과 정토극락」을 모두 얻는 위대한 수행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이 ‘무시선법’을 잘 알고 서로서로 가르쳐서 다함께 부지런히 닦는다면, 2천5백년 불교역사에서도 없었던 천여래 만보살의 시대가 반드시 오게 될 것이며, 온 세계에 소태산대종사님의 가르침이 찬란하게 꽃피는 날이 올 것임을 분명히 예견할 수 있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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