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한 시대, 순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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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악한 시대, 순진한 사람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5.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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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16

우리는 근래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한편으론 마음이 순진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개 순진하다는 것이 곧 어리석고 답답하다는 뜻과 동일시되어 ‘바보 같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순수하고 참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성품(자성)의 본래면목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본래면목이란 누구나 태어나기 전부터 가진 우리의 진짜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니, 곧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모자람도 물듦도 없는 천연(天然)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에선 순진한 사람이란 좀 지혜가 모자라서 영악한 이들처럼 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의 목적이 바로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악하다는 것은 곧 꽤나 임기응변 등의 분별지(分別智)가 있다는 것으로, 순수한 ‘자성의 지혜’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사실은 마음이 순진해야 이 참된 지혜가 솟아납니다. 그리고 이 지혜가 있어야 남을 해롭게도 하지 않을뿐더러 자기 자신도 망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아기들은 젖을 먹다가도 배가 부르면 바로 젖병을 밀쳐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다르지요. 아기들보다 몇 백 배 영리할 법한 어른들은 좋은 음식을 대하면 배가 부른데도 ‘나중을 생각해서’ 자기 양보다 훨씬 더 먹는 일이 많지요. 그리고는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합니다. 영리한 것이 순진한 것보다 도움이 되었을까요?


영리한 사람들은 더 빨리, 더 편하게 일을 하는 게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도 차로 다니며 될수록 몸이 편한 직업을 최고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 성인병이 걱정되어 따로 달리기도 하고 헬스클럽에 나가서 땀을 흘립니다. 영리하게 산다는 것이 정말 더 지혜로운 걸까요?


인과보응의 법칙에 의하면, 누구나 자신이 지은 선악의 업보는 반드시 돌려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믿는 이들도 얼마간의 재테크로 큰 이익을 바라는 건 예사이며, 이를 가리켜 ‘능력’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서 순진하게 사는 사람들을 자못 딱하게 여깁니다. 인과의 진리란 호리도 틀림이 없는 것인데, 정말 영리한 사람이 더 이익을 볼까요?


만약 어느 추운 날 추위를 녹이려고 난로에 불을 쬔다고 해보지요. 그런데 어떤 ‘영리한’ 사람이 추위를 빨리 녹이려고 난로에 무한정 가까이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몸을 데거나 옷이 타겠지요. 그렇다면 몸을 녹이기 위해선 난로에서 몇 센티미터 거리가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계산해야만 아는 것이 아니지요. 순수하고 참된 각자의 본래성품에서 저절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괜한 욕심을 내어 한없이 가까이 가거나, 몸이 다 덥혀진 뒤에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제 몸에 화상을 당하고 말겠지요. 참 지혜를 버리고 ‘영악하게’ 분별을 취해서 얻게 되는 고통이 마치 이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진리의 눈으로 본다면 영리함은 우리를 잠시 편안케 해주긴 해도, 결코 진정한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우리 각자가 삶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본래 순진무구한 자기마음을 되살리는 것이 진정 소중하고 급한 일이 아닐까요.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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