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놓기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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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놓기 연습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7.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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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류법인 교도의 모스크바의 창

저누무 가시나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 큰 딸애의 ‘졸업대장정’을 지켜본 소회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그랬다.


전통적으로 6월 22일은 러시아 전역의 모든 고등학교가 일시에 졸업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그 날을 위해 큰 딸애는 1월부터 그 날 입을 드레스며 머리모양, 구두를 고르느라 부산을 떨어댔다. 수험생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청소며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제외시켜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건만, 공부대신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는 모습을 볼 때면 속에서 불쑥불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수능이 끝나고 드디어 졸업식 날이 되었다. 졸업식은 오후 6시에 시작한다고 했다. 출근을 했다가 시간 맞춰 학교에 가면 되겠다 싶어 회사에 갔더니 아이 졸업식 날 출근하는 엄마가 어디 있냐며 러시아 직원들이 나를 계모 보듯 한다. 그 기세에 눌려 일찍 집에 오니 딸애는 거의 분장 수준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엄마의 등장에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졸업식 날만은 그냥 봐주기로 했다.


아는 언니가 하는 미장원으로 반드시 가야 한다고 고집하여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미장원을 가는 동안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달아 이를 악물고 참느라 턱이 다 욱신거렸다. 틀어 올린 머리에 어깨가 훤히 파인 드레스를 입고 10센티가 넘는 구두를 신고 엉거주춤 걸어가는 딸애 뒤를 따라가면서 참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그런데 왠걸! 졸업식장에 도착하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디즈니 만화 영화의 왕자비 간택 무도회장에서나 볼 법한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의 모든 구박을 꿋꿋이 이겨내고 나름 꾸미고 온 딸애가 갑자기 자랑스러워지려 했다.


자랑스러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1년 간 전 과목 올A를 받은 학생에게만 수여되는 금메달 수상자로 딸애가 호명되고, 덕분에 나는 러시아교육부장관이 수여하는 장한어버이상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딸애는 금메달리스트 신분으로 크레믈린 궁으로 초청을 받기까지 했다. 러시아 전역의 금메달리스트들이 다 모인다고 했다.


이 날 성인의 길로 들어서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위해 모스크바 시는 도로를 폐쇄시키고 시내 곳곳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졸업 파티를 하면서 밤새워 놀던 졸업생들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해돋이 행사까지 마친 후 집으로 흩어졌다. 드디어 ‘졸업대장정’이 끝난 것이다. 내가 이리도 시시콜콜 졸업식 준비 과정을 말하는 이유는 내가 겪고 있는 문화충돌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나로 인해 이곳 러시아에서 자라게 된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 그 어디에도 확실한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 끼이면 어쩌나…. 싶은 염려에서 기인한 미안함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말문이 트일 때부터 집에서는 한국어만을 쓰게 했고, 무심결에라도 러시아어를 하면 자로 엉덩이를 때려주었다. 더불어 두 언어를 확실히 하면 자유롭게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주입시켰다.


하지만 대학선택을 앞두고 대충 공부했던 러시아 친구들은 무료교육을 받는데 공부를 잘하는 자신이 왜 많은 학비를 내야하는지, 학비를 내지 않기 위해 국적을 바꾸면 어떠한지, 한국국민으로 사는 것과 러시아 국민으로 사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많은 질문을 해대는 아이에게 나는 속 시원한 대답을 못해주고 있다. 또한 내가 졸업식을 위해 딸애가 쏟았던 그 과도한 에너지를 미쳤냐는 말로 구박했듯이, 아이들 또한 나의 어떤 부분에 답답함을 넘어 단절의 벽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성장해 이 세계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심해질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이유로 나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이들이 여기서 자라면서 습득한 삶의 방식들을 용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겉도는 모녀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나를 우울하게 하지만 사전 예방책 역시 내 손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상대방 인정하기, 늘 열려있기 위해 애쓰기 등등 한마디로 분별 놓기 연습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할 것 같다. 내 딸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외로운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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