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선법의 이론과 실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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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선법의 이론과 실제 2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7.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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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21

「온 천지 그대로가 우리 선(禪) 도량 / 불법을 닦는 길이 따로 있으랴 / 언제나 끊임없이 가릴 것 없이 / 어느 곳 어느 때나 모두 공부길 / 그것이 선 공부요 거기가 도량 / 대종사님 밝혀주신 만고(萬古)의 대도 /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길일세」


무시선의 정신을 보여주는 성가 70장 무시선가 가사입니다. 이처럼 무시선은 삼학병진의 ‘살아있는’ 수행이며, 사반공배(事半功倍)의 공부법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교법을 사다리로 하여 생사자유와 해탈성불을 향해 언제 어디서든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등에 있어서 무시선이 가져오는 효과를 보겠습니다.


기쁨: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고 즐기는 경계에 마음이 주착되면 기쁨을 느낀다. 비록 좋아하고 즐기는 사물이 있더라도 그것에 마음이 끌려가지 않으면 기쁨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마음에 끌려서 새로 산 물건에는 큰 기쁨을 느끼지만 점차 그 물건에 담담해지는 것은, 처음엔 그것에 집착했다가 나중에는 그 집착을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쁨은 ‘그 사물’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마음이 끌렸기에’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수행인이 안으로 ‘빈 마음’을 지키면 좋은 경계가 와도 함부로 마음이 들뜨지 않는다. 무시선이란 천만경계에서 분별주착을 쉼으로써 끝없는 속박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다.


분노: 우리는 싫어하는 경계에 마음이 주착되어 있으면 화가 일어난다. 만약 평소 싫어했던 경계라 해도 그 경계에 마음이 붙들리지 않으면 화는 나지 않는다. 가령 누군가가 술집에서 ‘거액을 긁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도 정작 자기 남편이 그랬다면 성이 나서 못 견디는 것은, 마음이 그 경계에 붙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는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마음이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무시선은 ‘경계를 외면하자’는 게 아니라, 그것에 끌려가 사로잡힌 마음 - 즉 ‘분별주착’을 쉬자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고요하고 두렷한 본래마음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슬픔: 우리는 원치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마음이 끌려서 슬픔을 느낀다. 비록 원치 않았던 일이라 해도 내 마음이 그것에 주착되지 않으면 슬픔이 일지 않는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몹시 슬펐는데, 그가 몰래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다면, 처음엔 ‘이별’이라는 경계에, 다음엔 ‘배신’이라는 경계에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펐던 것은 ‘헤어진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마음이 붙잡혔기’ 때문이다. 무시선은 경계에 끌려 사로잡힌 마음에서 ‘분별주착을 쉬는’ 공부로써, 두렷하고 고요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두려움: 우리는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이 위협을 받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좋아해서 집착했다 해도 어느 순간 그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면 두려움은 바로 사라진다. 가령 큰 수술을 받는 사람이 그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다가, 모든 것을 하늘[眞理]에 맡기기로 작정한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자기에 대한 집착[我相]을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려움은 ‘수술’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온 것이다. 무시선은 마음에서 분별주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경계로부터 자유를 얻으며, 텅 비고 고요한 마음[性品]에서 나오는 공적영지를 우리 일상의 삶에서 그대로 쓰자는 것이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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