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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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노예'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8.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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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25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의 지배를 참 많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여 행동하지만 또한 그에 이끌려서 탐진치(貪瞋癡)를 일으키고 이어서 고락(苦樂)의 경계에 들어갑니다. 보통사람에게 눈은 사물을 보면서 미추(美醜), 염정(染淨), 성천(聖賤) 등등의 분별이 가득 일어나는 문(門)입니다.


우리는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불쌍히 여기지만, 앞이 잘 보이는 우리는 눈에 보기 좋은 것만 있으면 갖고 싶어 하고, 만약 그렇게 안 되면 괴로움을 느낍니다. 입을 옷이 많아도 백화점에 가면 예뻐 보이는 옷이 또 우리의 눈을 잡아끕니다.


어떤 꽃들과 동물들은 단지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생명이 꺾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위해 목숨을 빼앗깁니다. 반면에 또 어떤 곤충들은 우리 눈에 ‘징그러워’ 보이기 때문에 자주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 눈의 지나친 분별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에 극도로 집착하는 우리의 병(病)은 ‘성형시대’라 불리는 요즘 극에 달한 느낌입니다.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건 마음이 일으킨 분별이며 집착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한, 아름다움의 완결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름다움을 위한 성형에 만족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석공이 산에서 자주 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던 바위를 가져다가 불상을 새겼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모습이 다 완성된 뒤에는 그 불상 앞에선 왠지 몸과 마음이 긴장되고 숙연해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돌입니까, 부처입니까. 마음에 ‘분별’이 일어나면 일체의 성속(聖俗)과 미추(美醜), 귀천(貴賤)의 상(相)이 따라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볼 때 주의할 것은 ‘좋다 나쁘다’ ‘예쁘다 밉다’ ‘귀하다 천하다’는 등의 분별을 일으켜서 한편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다 상(相)을 붙여서 그것에 끌리지 말고, 그냥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가령, 아기는 엄마를 볼 때 설령 그 모습이 흉하다 해도 무서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눈으로 보는데 미추의 분별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착(着)없이 보는 것이며, 업(業)을 짓지 않고 보는 것이며, 보되 ‘주한 바 없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 자기 엄마의 모습을 비교하며 미추의 상(相)을 갖게 되면 스스로 분별의식에 갇혀서 엄마의 얼굴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분별이 주착을 낳고 이어서 고락(苦樂)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정전 일원상 법어에는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하셨습니다. 눈으로 보되 잠깐이라도 분별주착을 놓으면 이렇게 ‘일원상의 진리’를 몸으로 받들어 수행하는 것이며, 이는 곧 ‘안으로 마음을 허공처럼 지키고, 밖으로 태산처럼 부동하라’는 무시선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원의 진리와 만나는 것은 결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의 본바탕이 곧 법신불이며 일원상이기 때문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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