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전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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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전깃불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10.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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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34

우리는 모두 대기(大氣) 속에서 숨을 쉬면서도 평소 공기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추운겨울에 입김을 ‘호~’ 하고 불게 되면 바깥의 찬 공기[경계]에 부딪혀 입안에서 나온 공기가 하얗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물고기들은 하루 종일 물속에서 살지만 그들의 눈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속에 있다 해도 언제나 물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요. 때때로 공기[경계]에 의해서 뽀글뽀글 물방울이 생길 때는 또한 ‘물’의 존재를 금방 알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그 자체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다만 이놈은 경계에 부딪쳐서야 갖가지 ‘분별작용’ 으로써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禪)이란 곧 이 마음을 찾고 깨치고 바로 쓰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존재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쓰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마음을 찾고 깨치지는 못했어도 이것을 상황에 맞게 잘 쓸 수는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전기가 만들어지는 원리는 알지 못해도 누구나 전깃불을 사용할 수는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제 본래마음을 깨쳐서 안다는 것이 마치 물리학자가 전기의 원리를 깨쳐서 아는 것과 같다면, 우리가 마음을 올바로 사용하는 일은 또한 보통사람이 자기 집안의 전기스위치를 올리고 내림으로써 아무 문제없이 전등을 사용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집안의 전기가 나갔을 때 전기의 원리를 모르고 있으면 자기 힘으론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자잘한 경계가 아니라 아주 큰 경계가 닥치게 되었을 때 자기 본래마음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어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수많은 경계로부터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마침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면 반드시 제 마음의 본래모습을 깨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근원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은 간단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마음의 근원(본래모습)을 깨치도록 그야말로 깊고 간절한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간절함으로써 마침내 깨침을 얻은 뒤에 자기 본래의 마음을 경계에 부려 쓰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만약 의심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리어 안으로 모든 잡념을 놓아버리고, 안팎으로 고요하고 생생하게 깨어있는[寂寂惺惺]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고요하고 밝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의심을 품고’ 공부하는 것은 물론 간화선(看話禪)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을 고요하고 깨어있게’ 하는 공부는 곧 묵조선(默照禪)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정전에 있는 삼학병진의 무시선법은 묵조선의 원리입니다.



남방수행법인 위빠사나(Vipassana)는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보는 공부[觀法]로서, 마음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다보면 어느새 망념과 주착이 모두 사라지고 ‘경계’와 ‘마음’이 둘이 아닌, 안팎이 모두 고요하고 밝은 경지가 나타납니다. 이 수행법은 시작에서만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그 결과는 묵조선과 똑같은 것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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