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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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종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2.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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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51

한 스님이 용아(龍牙: 835~923)선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옛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마치 도적이 빈방에 들어간 것 같았네.”



제자의 질문은 깨달음의 내용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사의 대답은 도둑이 무언가를 훔치러 들어갔는데 글쎄 방이 텅텅 비어있더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본래면목[自性]을 깨친 선지식으로서 참으로 기막힌 표현입니다. 자기의 성품을 본[見性] 뒤에 그 자리를 말로 표현한 옛 기록들이 많지만, 이렇게 멋있고 딱 들어맞는 비유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이런 시도 있습니다.



머리는 세도 마음은 안 센다고 / 옛사람 일찍이 말했던가 / 이제 닭 우는 소리 듣고 / 장부가 능히 할 일을 마쳤네 // 홀연 내 집 소식을 알고 나니 / 모든 게 다만 이렇고 이럴 뿐 / 천만 경전 보배 같은 말씀도 / 원래 하나의 빈 종이로세.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千萬金寶藏 元是一空紙)



우리나라 조선 중엽 서산대사(西山大師)로 유명한 청허(淸虛)스님의 오도송(悟道頌)입니다. 이 분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대낮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홀연 깨쳤다고 합니다. 위 시는 몹시 갈망하던 깨침을 얻고 난 스님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머리가 희어지지만 어찌 마음이 늙는 일이 있겠습니까. 형상 있는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지만, 형상 없는 이놈은 결코 나지도 죽지도 않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물건 아닌’ 물건은 늘 내 몸을 지배하며 나를 웃고 울고 성나고 두렵게 하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놈의 실체(實體)를 알려고 참 무진 애를 썼습니다.


문득 닭 우는 소리에 홀연히 자기의 본바탕을 깨닫고 보니, 세상 모든 게 다 그렇게 제 모습 그대로더라 - 그래서 그동안 가졌던 온갖 의심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곤 마지막으로, 천만금 보석 같은 부처님의 무량법문이 알고 보니 원래 빈 종이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양이 있고[有相] 함이 있는[有爲] 법문은 모두다 껍데기였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스님이 본 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이면서 또한 우주만유의 실상(實相)인 이른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자리로부터 일체 삼라만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때문에 이렇게 자기의 근원(根源)을 깨쳐야 비로소 세상을 제대로 보고 느끼는 참다운 육근(六根)을 갖추게 되는 거지요.


금강경에서는 「여래께서 가히 설할 정(定)한 법이 없다(無有定法如來可說)」고 하였습니다. 사실 진리는 공(空)하여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는데, 자기의 성품을 보지 못하면 누구든 진리가 있다[有], 혹은 없다[無]는 분별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내 스스로 나를 구하려면 어서 나의 본래모습을 깨쳐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의 법문이 다 내 안에 있는 자성의 지혜광명[空寂靈知]에서 온 것입니다. 때문에 내 안의 보배를 모르고 밖에서 구하면 무량겁이 지나도 진리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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