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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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일여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3.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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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54

조주(趙州)스님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원불교의 교리는 이미 4대 교리표어에 다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인 <처처불상 사사불공> 말고는 사람들 입에 그다지 많이 오르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무시선 무처선>조차 ‘일상생활을 모두 접고’ 오로지 선(禪)만 한다는 뜻으로 아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선이라 하면 곧 좌선만을 떠올리기 때문에, ‘앉아서 선만 하면 언제 일하고,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나?’ 하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선이란 내 마음이 적적성성(寂寂惺惺)하기만 하면 몸이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선정(禪定)인 것을 알지 못한 탓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동정일여(動靜一如)란 ‘동정이 한결같다’ - 즉 ‘일이 있을 때나[動] 일이 없을 때나[靜] 늘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한결같다는 것일까요. 바로 마음상태가 한결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많은 이들이 의문을 냅니다. 가령, 조용히 앉아서 선을 하고 있을 때는[靜時]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해질[空寂] 수 있음은 알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일을 할 때도[動時] 마음이 똑같이 그렇게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과 경계를 대할 때는 마음이 그에 따라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기 마련인데, 과연 사람의 마음이 공적(空寂)한 채로 생활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문은, 사람의 마음이 경계가 없으면 텅 비고 고요하게 되지만 경계를 대하면 반드시 요란함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이란 공적(空寂)하기만 하면 그 순간 저절로 두렷이 밝아져서[圓明], 몸으로 어떤 일을 하거나 마음이 고요하고 밝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체험하지 못해서입니다.


때문에 사람이 앉아있든 서서 움직이든 일을 하든,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하면서도 두렷하게 밝으면 이것이 진짜 선(禪)이고 살아있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정산종사께서 권도편 52장에 「정(定)을 쌓되 동정(動靜)에 구애 없는 정을 쌓으라」고 법문하셨던 것입니다. 정(定)은 정(靜)할 때뿐만 아니라 동(動)할 때도 똑같이 가능한 것이니, 동정을 가리지 말고 수행하라는 가르침인 것이지요.


이 글 첫머리에서 조주스님이 ‘정(定)은 정(定)하지 않은 것’이라 한 뜻은, 정은 그저 공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혜(慧)가 있어야 참 정(定)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것을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것(活物, 活物)’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정(定)이 활발히 살아있기에, 일이 없어 마음이 고요해도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靜中動]’이 있어 이를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다’고 하며, 일이 있어 마음을 써도 고요하고 텅 빈 마음은 변함이 없어서 이는 곧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動中靜]’이라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어야 동정일여이며, 이것은 곧 무시선인 것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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