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확신
상태바
세 가지 확신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4.13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58

얼마 전 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중국 후진타오 주석의 인도방문을 앞두고 한 사람이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채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며 달리는 사진이었습니다. 시뻘건 불길이 몸을 몇 겹이나 에워쌌는데 눈을 꽉 감고 절규하는 모습이 너무도 처절했습니다. 자기 몸을 불태우면서까지 세계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신념은 ‘티베트의 독립’이었습니다. 비극적이지만 이렇게 한 사람의 신념은 세계를 울렸습니다.


확고한 신념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종교만큼 강한 것도 드뭅니다. 지금 눈을 안으로 돌려서 새 시대, 새 종교인 원불교도로서 우리가 어떤 가르침을 죽도록 확신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았으면 합니다.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그런 것 말고, 내가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바뀌지 않을, 철저하게 확신하는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성인의 근본 가르침을 어김없이 그대로 확신하고 있을까요. 아래 세 가지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맨 먼저 우리는, 너와 나의 ‘마음바탕’[자성]이 법신불 일원상이며 사은의 뿌리[본원]임을 확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원상을 ‘내 안에서’ 찾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합니다. ‘법신불일원상’은 법계(法界)라 하는 어느 특별한 장소에 있으며, ‘진리’는 우주의 어떤 특정한 곳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진 않습니까. 법신불일원상과 진리는 같은 뜻이며, 법계라는 곳은 형상 없는 진리의 세계, 곧 우리의 ‘자성계(自性界)’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유상(有常)으로는 나고 죽음[生滅]이 없으며, 무상(無常)으로는 인과보응의 뿌리[근원]인 곳 ― 이곳이 우리의 자성계이며, 또한 법계라 불리는 곳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각자의 자성(自性)을 자유로이 부릴 수 있는 뛰어난 교법이 있음을 확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원불교수행의 근간(根幹)인 ‘무시선 무처선’의 가르침이 완벽한 자기제도의 길임을 아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시선 공부는 삼대력을 얻어서 성불하는 사반공배(事半功倍)의 공부이며, 생사자유와 윤회해탈과 정토극락에 이르는 길로서, ‘닦는 법’만 자세히 알면 농부도 장인(匠人)도 상인도 관리도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처소(處所)와 동정(動靜)에 상관없이 할 수 있다는, 소태산대종사님의 주요 가르침을 모르거나 그 길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원불교도로서 그의 수행은 알맹이가 빠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는, 우리 원불교가 법신불일원상을 진리의 상징으로 세운 까닭은, 계단을 뛰어넘어 진리에 쉽게 들고, 이 진리를 눈앞에서 즉각 활용토록 하시려는 뜻임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산종사께서는 법어 원리편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께서 이 일원상으로써 교리의 근원을 삼아 모든 공부인으로 하여금 이를 신앙케 하고 이를 연구케 하며 이를 수행케 하신 것은 곧 <계단을 초월하여 쉽게 대도에 들게> 하고 깊은 이치를 드러내어 <바로 사물에 활용케> 하심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거나 깊이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의 교법수행은 결국 피상적이 되고 에둘러가는 공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원불교 백주년을 앞둔 지금, 각자의 신앙과 수행이 교법의 근본 가르침과 어김없이 들어맞는지를 살펴보고, 성인의 위대한 가르침이 우리 안에 올바르게 자리잡고, 그리하여 견성과 해탈성불이라는 꽃으로 피어나도록 정진하는 도반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