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상태바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4.19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59

「만약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에 대해 분명히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법성, 자성]을 관해야 할 것이니, 일체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라.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화엄경)



불교와 기독교는 겉보기엔 모두 신앙을 중시하나, 안을 들여다보면 두 종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고 또 부처가 될 수 있지만 기독교에선 아무도 예수와 같은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진실한 ‘믿음’을 넘어서 각자의 ‘수행’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불자(佛子)라 일컫는다면, 궁극적인 우리의 소원은 곧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서가모니께서는 화엄경에서 부처가 되고 싶은 불자들에게 ‘부처’라는 존재를 설명하는데 위와 같이 결정적인 단서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계의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법계의 성품을 본다면’ 바로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만약 법계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도 부처님의 참 모습[實相]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법계의 성품이란 불성 혹은 자성을 가리킵니다. 법은 곧 진리를 의미하니, ‘진리계’의 성품이나 ‘부처’의 성품이나 ‘본래 그러한’ 성품이나 다 똑같은 뜻입니다. 즉 ‘법신불일원상’의 자리입니다.


일원(一圓)은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本性)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신불일원상은, 밖으로 우주만물이 저렇게 나타나게 된 모태(母胎)이자, 불보살 성인들이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는 마음자리이며,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속에 덮여서 감추어진 우리 본래의 마음바탕입니다. 때문에 일원은 내외(內外)가 없어서 바깥으로나 안으로나 동일한 것[자리]이며, 저 우주나 부처나 중생이나 누가 더 갖고 덜 갖고 하는 게 없습니다.



「일체 중생들은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나지 않고 영원히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육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이름과 모양[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이 망녕되이 일어나서 갖가지 업을 지으니, 만약 한 생각 돌이키기만 하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馬祖錄)


즉, 중생은 스스로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법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에 임시로 갖다 붙인 이름[名]과 갖가지 모양[相]에 혹하여 어지러이 망념을 일으켜 업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화하는 삼라만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변하지 않는’ 참된 본성을 깨쳐 얻고[悟得], 그 오묘한 원리(空圓正)를 삶 속에서 행동으로 자유자재로 나투면 그가 곧 부처이며, 그렇지 못하면 중생인 것입니다.


「우주의 분별 없는 자리를 깨쳐 아는 것을 부처의 지견(知見)을 얻었다 하고, 우주의 분별 있는 자리를 알아서 천만 경계에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부처의 행(行)을 한다 하나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 8장)


수학이 아무리 복잡해도 결국은 0과 1로 된 숫자의 더하고 빼기로부터 나왔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중생 스스로가 제 본성을 깨치고 그것을 바르게 쓰는 법 말고는 없습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새 회상을 여신 대각개교절의 4월에, 부처와 진리와 마음에 대해서 짚어보았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