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 주어도 도에는 어긋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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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어도 도에는 어긋나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5.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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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60

한 제자가 조주(趙州) 선사에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


“내가 청주에서 베옷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더구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옛날 어느 학인(學人)이 그 스승에게 도를 물었더니 스승이 말하되 “너에게 가르쳐 주어도 도에는 어긋나고 가르쳐 주지 아니하여도 도에는 어긋나나니, 그 어찌하여야 좋을꼬” 하였다 하니, 그대들은 그 뜻을 알겠는가?」(성리품 13장)


소년시절부터 끊임없는 의심을 품어서 마침내 대각을 이루신 소태산대종사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갈망해서 깨친 진리이니, 그 소중한 진리를 그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다 일러주시면 되는 일일 텐데, 왜 위와 같이 말씀하셨을까요. 진리를 안 가르쳐 주는 것이 도에 어긋남은 쉽게 이해되지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도 도에 어긋난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른바 진리(眞理)라는 것은 우리가 육근(六根)으로써 보고 듣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제자를 아끼는 스승이라 해도 진리를 말이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단번에 전해서 깨닫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심지어는 아비가 자식에게도 전해줄 방도가 없다는 부자부전(父子不傳)이라는 표현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선종(禪宗)에선 스승이 제자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화두(話頭)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도 교법에 진리를 상징하는 일원상을 모시고 ‘일원상의 진리’ 법문을 정전의 첫머리에 두고 있지만, 이 법문을 단순히 읽고 풀이하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진리를 깨칠 수 없기 때문에 의두(疑頭) 20개를 수행과목에 넣어서 참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즉 화두나 의두는 ‘언어의 길이 끊어져’ 말과 글을 통해선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언어와 문자를 뛰어넘어 궁극(窮極)의 자리를 깨치도록 해주려는 스승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말과 글로써 진리에 관해 자상하게 설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장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알고자하나 무언지 몰라서 답답한 이가 그 설명을 들으면 대체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진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어,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뒤에 자신이 진리를 ‘이해한다’고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이제 그 궁극의 진리를 직접 ‘깨치려는’ 욕망이 크게 줄어듭니다. 그래서 정말로 애타게 진리를 구하는 이들이 적어집니다. 흡사 배고프던 사람이 고구마 몇 개로 허기를 채운 뒤엔 정작 양식을 구할 생각을 안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진리에 관한 이론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오직 그 자리를 깨치고자 큰 분심(忿心)을 일으켜 깊은 의심을 품는 사람은, 스스로 간절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화두공부가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바람대로 언어가 끊어진 길을 건너서 마침내 진리를 깨치는 순간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치가 그렇듯이, 경사(傾斜)가 완만하면 돌아서 가야할 길이 멀고, 반대로 거리가 가까우면 경사가 가파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공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다만 불자라면, 화두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뜻이 통하지 않는다 해서 단순히 옛 선사들의 한가한 ‘말장난’쯤으로 잘못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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