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뵈온 소태산 대종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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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뵈온 소태산 대종사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6.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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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일대재 기념 소태산 대종사 추모법회 / 송영지 원로교무

오늘은 새 회상 주세불이신 소태산 대종사님이 대 열반상을 나투신 지 69년이 되는 해입니다. 주세불이신 소태산 대종사님을 뵈옵게 된 은혜가 너무 커서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열반하실 때가 제가 소학교 5학년 12살 때로,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5월 16일 발병을 해 2주간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6월 1일 열반에 드셔서 총부로 돌아오셨는데, 그야말로 총부 전체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고 산천초목까지도 우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는 삼사일을 연속으로 쏟아져 내리고 조실 앞에 있던 수양버들은 축 늘어져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슬픔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너무나 안타깝고 너무나 기막힌 일이었기 때문에 크나큰 슬픔과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방학이나 명절 때, 또는 힘들 때나 기쁠 때면 당시 동산동에 위치해 있던 소태산 대종사님의 산소를 찾아가 앉아 있곤 했습니다.



# 수염이 많으셨던 대종사님


소태산 대종사 할아버님과의 처음 인연은 제 나이 3살 때 어머니와 외조모께서 소태산 대종사님을 친견하시면서 부터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태산 대종사님을 뵈 온 그 자리에서 전무출신을 서원하시고 제가 12살 되던 그 해까지 소태산 대종사님의 의복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근무하셨습니다. 그 10년 세월 동안 소태산 대종사님의 간절한 호념이 있었기에 제가 전무출신의 소중한 꿈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기억에 남아있는 소태산 대종사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은 수염이 많으셔서 매일 아침이면 늘 면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문안인사를 드리려 가면 목욕탕에서 면도날을 세우셔서 면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저를 보시면 가끔 무릎에 앉히시고 볼을 부비시는 바람에 아파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당시 총부에서는 김영신 선생님께서 소태산 대종사님을 보필해 사무를 보셨는데 그럴때면 시봉진들과 함께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드시곤 했습니다.


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열반을 앞두고 총부 구내에 사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회를 조직하도록 했는데, 주산 송도성 선생님이나 묵산 박창기 선생님, 융타원 김영신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우리를 돌봐 주셨습니다. 특히 매주 일요일 저녁시간에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꼭 참석을 해 장기자랑을 시키기도 하고, 하자는 계문과 말자는 계문을 외우도록 하시고는 과자나 과일 등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총부에 살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소태산 대종사님은 무섭고 엄한 어르신이라기 보다는 늘 다정다감한 뵙고 싶은 어른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끔 명절이 되어 색동저고리나 누비저고리를 입고 문안을 가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늘 “그 옷 얼른 벗어 아무에게 주어라”하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칫 제 마음이 색동저고리나 누비저고리로 인해 화려한데 빼앗길까봐 경계를 해주셨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또 가끔 서울에서 팔타원 황정신행 선생님이나 의타원 성의철 선생님 같은 분들이 오셔서 대종사님께 효를 다 하시곤 했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서 꼭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 분들이 총부에 오시면 알봉 인근 과수원에서 밤을 사 찐다든지, 지금의 원광대 자리에 있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사서 대중공양을 했는데, 이분들이 복을 짓는 방법은 총부에게는 장사를 시켜줘서 좋고 대중들에게는 보시할 수 있어서 좋은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어디에서 구하셨는지 보릿대로 만든 예쁜 가방에 시골에서는 구경도 못할 과자와 사탕을 가득 담아 구내에 있는 공가나 사가에 일일이 돌리기도 하고, 전무출신을 서원한 사람들에게는 저고리를 똑같이 맞춰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나도 얼른 전무출신이 되어 저런 보시공덕을 지어야 하겠구나 생각하며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소태산 대종사님께 올리신 공양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셨는지 팔타원님께서는 대중들 앞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승무를 추시고, 의타원님께서는 부채로 엉덩이를 두드리며 ‘비단장사 왕서방’을 부르셔서 대중들에게 웃음을 주신 적도 있습니다.



# 건방져 보이니 뒷짐지지 마라


또 한번은 이 분들이 공사다망한 소태산 대종사님을 위해 피로도 풀고 구경도 할겸 원숭이 한쌍을 보내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를 마땅히 돌볼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주로 풀을 뜯어다 먹이고 그랬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나도 모르게 뒷짐을 쥔 채 구경을 하고 있으니 대종사님께서 지나가시다 보시고는 “어른 앞에서 뒷짐을 쥐면 건방져 보여서 안된다”고 꾸지람을 하신 일도 기억납니다. 생각해보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저에게 별로 예쁜 말씀을 해주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목덜미 쪽에 종양이 있어 정세월 어머니가 치료를 하시곤 했는데, 한번은 마침 치료를 하시는데 갔더니 “거기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여기 상처 좀 낫게 좀 빨아봐라” 하셨습니다. 후에 생각을 해보니 제가 너무 깨끗한데 치우칠 까봐 미리 경계해 주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제게 처음 주신 법명이 주설이었는데, 장난 끼가 많은 남학원생들이 곧잘 제 이름을 가지고 놀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찾아가 남학원생들이 자꾸 이름을 가지고 놀린다며 바꿔달라고 매달렸더니 “네 이름은 아무에게나 주는 법명이 아니다. 상주설법이란 말 가운데 자를 따서 지었기 때문에 상법은 나중에 따라 오게 되어 있다. 앞으로 언젠가는 법석에 앉니 않더라도 네 몸에서 법이 설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창씨 개명을 할 때 지금의 법명인 영지란 법명을 주셨는데 이 법명 역시 공적영지에서 따서 주신 법명으로, “이 법명과 같이 일원상 진리 그대로 살고 일원상 진리 그대로 공부하고 일원상 진리 그대로 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퇴임을 해서 매일같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생각하시던 귀한 보물은 무엇이고 그 귀한 보물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라의 주인도 있고 세상의 주인도 있고 진리의 주인도 있지만 우리는 정신을 개벽해 낙원세계를 건설하는 주인이 되어야 겠다 그런 생각으로 적공을 하고 있습니다. 삼학팔조로 수행과 사은사요 신앙으로 영원한 은혜와 무한한 진급을 위해 정진적공하고 보은봉공하는 공부인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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