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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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7.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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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70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대종경 성리품 11장)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佛眞身]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아니함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다.”


“어째서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않음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有]은 없음[無]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난다. 본디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없음도 또한 존재하지 아니하니, 이미 없음[無]이 존재하지 않는데 있음[有]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있음과 없음이 서로 인해서 비로소 있으니 모두가 생멸(生滅)인 것이라. 다만 이 두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다.”《頓悟入道要門論》



윗글은 중국 당나라 때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가 지은 책으로, 부처님의 참된 몸[佛眞身]을 빌어서 진리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있음’도 보지 말고 ‘없음’도 보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본다 하였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법신불 일원상’을 보는 것입니다. 즉, ‘있다’ ‘없다’라는 두 상(相)을 모두 버려야 진리의 참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일원(一圓)은‘유무초월’의 자리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종사께서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게송은 흡사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하지만, 진리란 티끌만한 상(相)도 붙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게송도 무어라 떠올리는 순간 이미 그것과는 멀어져버립니다. 즉 ‘변산 굽은 길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데’ 하고 생각을 시작하면 벌써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없고 없으며 또한 없다는 것도 없고…’ 이렇게 아무리 깊이 들어간들 게송의 본래 뜻은 얻을 수 없습니다. ‘있다’ ‘없다’ ‘그렇다’ ‘아니다’라는 상(相)을 버리지 않고선 결코 ‘상(相) 없는’ 그 자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마치 색(色)으로는 허공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진리를 가리키는 게송은 생각으로써는 그 자리를 만날 수 없습니다.



허나 그 자리는 아무도 갈 수가 없는 자리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사실은 우리의 마음바탕이 본래 이 자리라서 여기엔 들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망념주착이 이 자리를 뒤덮고 있으니 언제든 그것을 걷어내면 저절로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일원상 앞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분별 짓는 모든 생각 ― 가령, 저것은 진리의 표상이라거나, 청정법신불이라거나, 텅 빈자리라거나, 성스럽다거나, 둥글다거나, 우주의 본원이라거나, 나의 본래마음이라거나, 수행의 표본이라거나, 등등 ― 을 다 내려놓고 일원상을 대합니다. 그러면 나는 곧 일원상과 ‘둘 아닌’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잘 보고, 잘 느끼고, 잘 구별하게 되지요. 마음에서 일체의 상(相)이 사라지면 나의 원상(圓相: 텅 빈 자성)이 눈과 몸과 마음을 통해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모든 상(相)을 떠나 대상(對象)과 둘 아닌 경지가 되면, 이게 바로「無無亦無無 非非亦非非」의 자리입니다.



설명하자면 위와 같으나 단지 참고용일 뿐, 이 자리는 생각으론 더듬을 수도 없고 결코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게송의 참뜻을 밝히려면 오직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바탕[自性]을 봄으로써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지극한 경지[究竟]는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그 어떤 설명이나 상상으로도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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