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을 어찌 믿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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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을 어찌 믿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7.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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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71

정(鄭)나라의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러 가는데 먼저 끈으로 자기의 발 길이를 재두었다. 이윽고 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고른 뒤에 미리 재 두었던 끈을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가 가게주인에게 말했다.


“내가 집에 좀 갔다 와야겠소. 깜박 잊고 내 발 치수 잰 것을 놓고 왔구려.”


주인이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는데 그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그 끈을 찾아서 다시 시장으로 왔으나 장이 파하여 가게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신발을 사러 갔다면서 왜 직접 발에 맞춰보지 않았는가?”


“단단히 잰 치수를 믿어야지, 어찌 발을 믿을 수 있겠나?”《韓非子》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이여!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알지 못하여, 법을 구하되 멀리 모든 성현에게서 찾으며 부처를 구하되 자기의 마음을 관(觀)하지 아니하니,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하면서 이 뜻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려는 이는,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다 읽어서 갖가지의 고행을 닦을지라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처럼 오직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라, 다만 자기마음을 알기만하면 항하사같이 무수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않아도 얻으리니, 그런 고로 세존이 이르시되 “널리 일체 중생을 보니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었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가 다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온다” 하셨으니, 바르게 알지어다, 이 마음을 떠나서는 가히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신발을 사러가서 자기 발 치수를 잊었다고 그냥 돌아오는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요. 그러나 실물보다도 수치를 더 중시하고, 현실보다도 허구를 더 믿는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많습니다. 종교에서도, 이름만 ‘부처님’이고 ‘하나님’이고 ‘일원상’일뿐, 서로 바꾸어 불러도 전혀 다름없는 대상을 향해, 늘 뭔가를 달라고 빌면서 정말 진리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신비하게 말할지라도 진리는 그 근원이 ‘마음’으로서, 이 마음은 본디 생멸이 없고 모든 인과현상의 원천(源泉)입니다. 때문에 이 마음을 저버린 채 위대한 진리를 상상하고 복과 혜를 구하는 것은, 자기 발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발 치수 잰 것을 찾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체가 유심조’이며 ‘마음이 곧 부처요 성품이 곧 법’이라는 불조(佛祖)의 가르침도 자기 마음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이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고, 인과보응의 진리는 호리(毫釐)도 어긋남이 없어서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그런데 조금 주고도 큰 것을 달라하고, 하지 않은 일에도 좋은 결과를 바라며 인과의 법칙에 ‘예외’가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정말 불법(佛法)을 믿는 것일까요.


지금 나의 마음바탕[性品]이 아닌 그 어딘가에 법신불이 있고 진리의 세계[法界]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환상(幻想)이고 미신입니다. 불조(佛祖)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 각자는 없어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진리의 몸[法身]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믿으려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또 ‘진리’를 상상(想像)하며 빌고 또 비는 것은, 마치 자기가 자기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도와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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