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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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선악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8.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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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73

당나라 때 시인이며 정치가인 백거이(白居易, 字는 樂天: 772~846)가 항주자사(杭州刺史)로 부임하여 조과(741~824)선사를 찾아갔는데, 그때 선사는 나무 위에 올라가 선(禪)을 하고 있었다. 백낙천이 말했다.


“스님, 너무 위태롭군요.”


“내가 보기에 그대가 더 위태하오.”


“나는 벼슬이 자사(刺史)에까지 올랐고 이렇게 땅을 밟고 있는데 뭐가 위태하단 말이요?”


“티끌 같은 세상지식으로 교만해져서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는가?”


백낙천이 선사의 법력을 간파하고 공손한 태도로 가르침을 청했다.


“제가 어떻게 수행해나가야 합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말 아닙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백 살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



요즘 인기를 모은 드라마 두 편을 보면, 모두 권력과 재력 뒤에 숨은 악한 자들과 이를 추적하는 착한 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시청자들은 언제나 선한 자들의 편이 되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이 악을 범하는 건 나쁜 일인 줄을 모르거나,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안 지키거나 혹은 지키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자기에게 오는 이익 때문입니다.


만약 부유한 어버이를 두지 않았다면, 사람은 누구나 제 힘으로 의식주를 다 해결하고 자식을 보살펴야하며 추위를 넘겨야합니다. 그러기에 윤리적인 가르침만으론 수천 년 동안 서로 경쟁하며 이기적이 된 인간의 습성이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를 일러주지 않고, 단지 악을 범하지 말라고만 해선 사실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흡사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같은 거지요.


조과 스님이 말한 ‘제악막작 중선봉행’은 법구경(法句經)에 있는 내용으로써, 위의 대화에선 ‘어떻게’라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즉, 이 법문에선 세 번째 구절인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가 퍽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부분이 ‘어떻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인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함은 ‘결과’에 해당하는 것이며, 뿌리와 줄기가 다같이 튼튼한 나무에서 나는 ‘잘 익은’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수양과 연구가 잘된 상태에서 상(相) 없이 이루어지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취사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실제 어떤 경우에도 뿌리와 줄기가 썩었거나 부실하면 잘 익은 사과는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비어야 두렷한 지혜가 나고 그래야만 비로소 바른 행위가 나타납니다. 만약 ‘빈 마음’이 아닌데도 바른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착(着)에서 나왔거나 상(相)이 있거나 이익 혹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 예로부터 선종의 조사(祖師)들은 정혜(定慧)를 올바른 수행의 요체로 삼았습니다. 그러기에 대종사께서도 ‘천만 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된다.’(인과품 16장)고 하셨던 거지요.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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