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의 도, 실제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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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속의 도, 실제의 도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9.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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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77

동곽자(東郭子)가 장자(莊子)에게 물었다. “도라는 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장자가 말했다. “어디에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지요.” 묻기를, “도 있는 곳을 분명히 가리켜주십시오.” 답하기를,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습니다.” 묻기를, “어째서 그렇게 하찮은 곳에 있습니까?” 답하기를, “강아지풀이나 (논에 있는) 피에도 있지요.” 묻기를, “어찌해서 더욱 하찮은 것에 있습니까?” 답하기를, “기왓장이나 벽돌조각에도 있습니다.” 묻기를, “어찌해서 더욱 심해집니까?” 장자 답하기를, “똥과 오줌에도 있습니다.” 동곽자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 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東郭子曰 期而後可. 莊子曰 在ꠙ ꠓ蟻. 曰何其下邪. 曰 在ꠙ ꠗ稗. 曰 何其愈下邪. 曰 在瓦ꠙ ꠙ. 曰 何其愈甚邪. 曰 在屎溺. 東郭子不應.)《莊子》



진리(하나님, 道)는 어디나 없는 곳이 없다[無所不在]고 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말이지요. 내 몸을 비롯해서 우주전체가 진리 본체[진공]의 나툼[묘유]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가 ‘심오한 곳’ ‘신성한 곳’ ‘중생은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다고 믿습니다. 나의 본바탕[本性]이 진리의 본체요, 내 몸과 모든 생물, 심지어 돌이나 똥오줌도 다 진리의 화현(化現)인데, 중생은 도를 찾으려고 먼 곳을 바라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좋게 보이는’ 것들, 즉 깨끗하고 아름다고 착하고 올바른 것들만 진리의 작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 삼라만상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작용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진리의 모습입니다. 저마다 인과(因果)의 원리로 그렇게 나타나니, 반야(般若: 공적영지)에서 비롯된 불보살의 자비도, 중생의 탐욕으로부터 오는 더럽고 사악함도 모두 진리의 작용[묘용]입니다.


아직도 ‘불보살 세계’에 가야만 진리를 접할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경전에는 중생의 본바탕[본성]이 곧 진리[일원]라 하였는데, 왜 우리는 눈앞에 있는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옛날, 용아(龍牙: 835~923)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도 사람을 속이려는 뜻이 있습니까?”


선사가 답하였습니다.


“강이나 호수가 사람을 막으려는 뜻이 있겠느냐? 강과 호수는 사람을 막으려는 뜻이 없다. 사람이 지나가지 못해서 장애가 되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가 사람을 속이려는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뛰어넘지 못해서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 것이니라.”



우리 교법에서 당처불공, 실지불공은 일원상을 향해서 드리는 불공보다 낮은 불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처불공, 실지불공이 매사를 성공시키는 근원적인 불공으로써 진리를 상징하는 일원상 불공에 앞서는 것이지요. 당처불공이란 곧 온 우주 삼라만상에 깃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살아있는 진리’를 우리의 삶에 가져다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에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이 있고 살아있는 자가 똥오줌을 배출하며, 내 몸이 죽어서 부패(腐敗)하는 것은 다 사사로움이 없는 진리의 작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착하고 악한 마음을 내고, 정직하고 삿된 행동을 하며,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있는 것 또한 텅 빈 진리[道]가 저마다 가진 집착에 따라 인과의 원리로 나타난 것입니다.



진리는 이처럼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도를 신성하게 아는 것도 우습게 아는 것도 다 어리석은 분별입니다. 생로병사의 몸일지언정 도와 하나 되어 해탈성불 할 수 있는 것도 도가 있어서이며, 먹고 마신 뒤엔 아무리 성스러운 곳일지라도 똥오줌을 누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또한 도 때문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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