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새를 잡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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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새를 잡아도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9.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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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77

매에게 쫓기던 참새 한 마리가 급한 김에 스님의 장삼 소매 자락 속으로 들어갔다. 스님이 손으로 참새를 움켜잡고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내가 오늘은 고기를 먹게 생겼구나.”


참새가 눈을 꼭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님은 참새가 죽은 줄 알고 쥐었던 손을 폈다. 그러자 참새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 스님이 또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내가 너를 방생하노라.”《中國寓言》



재미있는 우화지요. 스님이 그저 자기 편한 대로 하면서 무슨 결과든 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나 있겠지만 특히 정치인들에게서 많습니다. 가령 한 당(黨)이 발표한 정책을 다른 당에서 마구 비판해 놓고서, 정작 자기 당 지도자가 비슷한 뜻을 밝히면 구국의 결단이라고 칭송합니다. 또 대통령이 어떤 무리한 주장을 하면, 국민들이나 정치인들 대다수가 그것을 옳지 않게 여기더라도, 대통령의 측근들은 그 뜻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그러다가 혹 그 결과가 나쁘더라도 지도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다만 예기치 못한 환경변화 탓이라고 말하면 그뿐입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이렇게 지도자의 짧은 생각[短見]으로 상황이 나빠져서 힘없는 아랫사람들이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세계정세가 ‘급변해서’, 우리사회가 ‘급속도로’ 변해서, 시장 환경이 ‘갑자기’ 변해서 라는 이유를 대지만 결국은 ‘혜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관한 세계적인 흐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러한 글을 보았습니다.


「미국 불교 인구가 약 700만을 헤아린다.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지 100여년 만에 불교가 미국 엘리트층을 비롯한 주류와 대중사회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미국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문화’ 또는 ‘철학’에 가깝다. 그들은 불법(佛法)에 관심을 기울일 뿐, 석가모니나 승단(僧團)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승려가 없는 재가중심 불교단체가 많고 참선만 하는 ‘선 센터’가 많다. ‘신심’에는 관심 없는 ‘과학적·이성적 불교도’들, 자칭 ‘불교적 기독교도’ ‘불교적 천주교인’이 수두룩하다. 그들에게 기독교 교회는 ‘결혼식장’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일예배는 거의 노인들 차지이고, 식사 전에 기도를 올리는 가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불자들은 계속 늘고 있다. 한국 사회와는 정반대이다.」


지금 미국의 기독교와 한국의 불교는 비슷한 처지인가 봅니다. 주로 기복과 신앙을 내세워 신도들을 모았던 종교가 이제는 젊은이들과 지식층이 외면하는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음 달 새로이 선출될 우리의 지도자는, 젊은이들도 스스로 찾아오는 원불교로 변모시켜서 우리 교단을 침체의 늪에서 건질 수 있는 혜안을 갖추신 분일까요.


‘전통적 관습’이나 기득권의 저항 등을 이유로 개혁을 망설이는 지도층을 그래도 좋은 쪽으로 이해하려는 충직한 이웃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개벽하자>라는 말을 개교표어 속에 담고 있는 원불교가, 밀려오는 종교적 ‘쓰나미’의 전조를 보면서도 다만 관습 때문에 내부혁신의 시기를 놓친다면 ‘약은 먹기 싫고 건강은 걱정되는’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오래된 한국불자들은 탑을 만들고 있는데 새로운 서양불자들은 지금 선방을 만들고 있습니다. ‘혜안(慧眼)’이란 관습이나 고정관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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