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에 집착 않는' 혜를 닦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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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에 집착 않는' 혜를 닦으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0.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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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80

「정(定)을 쌓되 동정에 구애 없는 정을 쌓으며, 혜(慧)를 닦되 지우에 집착 않는 혜를 닦으며, 계(戒)를 지키되 선악에 속박 없는 계를 지키라.」(정산종사법어 권도편 52장)



조주(趙州) 스님이 스승인 남전(南泉普願: 748~835)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도이다.”


“그래도 닦아 나아갈 수 있습니까?(還可趣向不)”


“무엇이든 하려 들면 그대로 어긋나버린다.(擬卽乖)”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不擬爭知是道)”


“도는 알고 모름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헛된 지각[妄覺]이며, 모른다는 것은 멍한 것[無記]이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참으로 통달한다면 마치 허공처럼 툭 트여서 한없이 넓은 것인데, 어찌 애써 시비를 따지겠느냐?(道不屬知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蕩豁 豈可强是非也.)”《趙州錄》



정산종사께서는 동(動)과 정(靜)에 모두 걸림이 없는 정(定)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인은 고요한(육근이 無事한) 경계뿐만 아니라 시끄러운(육근이 有事한) 경계에서도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함[定]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우에 집착 않는 혜를 닦으라’ 하셨습니다. 즉 지혜[智]와 어리석음[愚]에 매이지 말고 혜를 닦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자성의 혜’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혜’라는 개념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성의 혜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초월한 혜입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는 총명(聰明)함과 같아서 오랜 과거 전생으로부터 현재까지 많이 배우고 익힌 것이 쌓여서 나타난 결과라면, 자성의 혜는 공적영지입니다. 즉, 누구나 자기의 마음바탕[心地, 自性]에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지혜는 총명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학식이 높고 머리가 좋다고 자성의 혜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배움이 적고 머리가 둔하다고 자성의 혜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총명한’ 사람도 이 지혜가 막히면, 자성의 혜를 쓰는 ‘어리석은’ 사람만 훨씬 못한 결과를 불러들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탐욕과 집착으로 끝내 자신을 망치는 길로 가는 것은, 제 눈앞의 이익만 보일뿐 멀리 내다보는 참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리석게도’ 남에게 좋은 일만 하던 사람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나중에 많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참 지혜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와 자성의 혜가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성의 혜는 공적(空寂)한 마음바탕[自性]에서 저절로 나오는데, 이 자리[性品, 一圓相, 道]는 사람이 깨칠지언정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만약 이 자리를 ‘안다’고 하면, 원래 텅 비고 두렷한 자기의 성품[心地]을 그 ‘안다’는 생각[분별망상]으로 어둡게(요란하게) 하는 것이며, 반대로 ‘모른다’고 하면 스스로 아무 지각(知覺)도 없는 멍한 상태[無記]에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망상분별 없는 성성적적함 속에 자연히 솟는 이 지혜[자성의 혜]는, 지혜롭고 우둔함[智愚]이나 알고 모름[知不知]에 달린 것이 아니며, 그럼에도 이에 집착하는 이가 있다면 참 지혜[공적영지]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바탕한 수행을 하려는 사람은 ‘지우에 집착 않는 혜를 닦으라’고 하신 위 가르침의 뜻을 분명히 알고 수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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