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속에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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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속에 슬픔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1.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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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86

옛날 어떤 지체 높은 사람이 절로 나들이를 갔다. 절에서는 높은 분의 비위를 맞추느라 곡차를 내서 대접했다. 술이 들어가 주흥이 무르익자 고관이 옛 시 한 수를 읊었다.



“대나무 숲에 싸인 절을 지나 스님과 만나 이야기하노라니, 뜬구름 같은 인생에 한나절이나마 한가롭네(因過竹院逢僧話 又得浮生半日閑).”


주지 스님이 그 말을 듣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고관이 왜 웃는지를 물었다.


“나리께서 한나절 동안 한가하게 해드리려고 저희들은 지난 사흘간 몹시 분주했습니다.” 《古今譚槪》



‘만약 모습[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이라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금강경》



가을 단풍이 물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날씨가 추워지면 나무의 가지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라는 세포층이 생긴답니다. 그러면 잎으로 공급되던 영양분과 수분이 완전히 끊기면서 잎 속에 남아있던 카로티노이드와 안토시안이라는 색소가 분해되면서 노란색과 붉은색을 띄는데, 이것이 단풍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단풍은 추위에 나무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지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슬픔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지난 생에 많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온전한 몸으로 태어났으며 게다가 만나기 어려운 불법회상(佛法會上)에 들어온 것은 여간 큰 복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소중한 삶을 한때의 즐거움과 명예와 사치를 좇아서 허무하게 바치고 마는 것이 또한 중생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가 짓고 받아야할 복은 부처님이나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해 빌고 있지요. 반야심경에서는 이러한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했습니다. 즉 사물과 이치를 거꾸로 본다는 것이지요.


부처와 성인들께서 내놓으신 가르침의 뿌리를 ‘형상 없는 도’라 일컫는다면, 그 큰 줄기는 바로 “천국이 곧 네 안에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마음이 곧 부처다” “중생의 본성이 곧 일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안에 천국이 있으며’, ‘자기의 마음바탕이 곧 부처이고 진리임’을 믿지도 찾지도 확인하려고도 않는다면, 이는 부처님과 성인들을 공경만 할뿐 그 근본 가르침은 따르지 않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단풍의 색깔 너머에 보이지 않는 나무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듯이, 이생에 우리가 ‘사람의 몸’을 받고 이러저러한 복을 받아 살아가는 것은 지난 생에 저마다 많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가을 ― 흰 머리카락이 나고 잔글씨가 안 보이는 나이가 되면 아무리 바빠도 다음 생을 대비해서 부처와 성인들의 근본 가르침을 새겨 보아야합니다. 불보살의 지혜와 해탈의 근원인 ‘내 안의’ 법신불을 모르고 밖으로만 찾아다닐 것인가. 인과(因果)를 거슬러 나의 복을 부처님과 진리라는 허상(虛像)에게 빌 것인가.


붉게 물든 단풍은 아름답지만 곧 땅에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도 출세해서 삶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울수록 실은 곧 허무한 결말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다 잊히고 없어져버리는 것 말고, 인간으로 태어나 이제까지 실답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 복은 언제까지나 갈까요. 세상만사,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이 숨어있는 법이지요.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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