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 선사의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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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 선사의 거위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1.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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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88

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있은즉 막히고 공한즉 통하며, 막힌즉 어둡고 통한즉 밝나니라.」(법훈편 72장)



육긍대부(陸亘大夫: 764~834)가 스승인 남전(南泉普願)선사에게 물었다.


“한 농부가 병 속에 거위 새끼를 키웠습니다. 거위가 점점 자라서 몸집이 병 주둥이보다 커져버렸는데, 스님이라면 이 거위를 어떻게 꺼내시겠습니까? 병을 깨서도, 새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이에 남전 스님이 대뜸 “대부!”하고 불렀다.


육긍대부가 얼결에 “예”하고 대답하자 선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나왔다.”



노자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자는 날로 더하고 수도하는 자는 날로 덜어내니, 덜고 또 덜어서 함이 없는 데에 이르면, 함이 없으되 하지 않음이 없다.(爲學者日益 爲道者日損 損之又損之 以至于無爲 無爲而無不爲矣)」 덜어낸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비워지고 비워져서 본래의 모습[眞空]이 되면, 그 자리가 내 본래의 성품[本性]으로 법신불 일원상입니다. 이 자리는 텅 비었으되 두렷한 밝음[자성광명]이 있어 저절로 바른 행을 나투기에 이를 일러 공원정(空圓正)이라 하지요. 우리 각자에겐 이러한 본성이 갖춰져 있으므로 부처님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시고, 열반에 드시기 전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하라’ 하셨으며, 선종의 옛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 성품이 곧 법’이라 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산종사께서도 우리 자성(自性)의 공원정을 영주(靈呪)를 통해서 보여주셨듯이, ‘있은즉 막혀서 어둡고, 공한즉 통해서 밝다’는 것은 그대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에 어둡고 조사(祖師)의 선문답을 어려워하는 것은 마음이 사량(思量)으로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망념을 쉬어 분별시비가 사라지면 텅 빈 심체(心體)가 막힘없이 트여서 두렷한 지혜의 달[慧月]이 시방을 비추는데, 수도인은 이를 일러서 ‘안팎이 밝다’고 하지요.


사람이 제 스스로를 가로막고 어둡게 하는 것은 분에 넘치는 욕심과 아집(我執) 때문입니다. 나의 헛된 욕심은 ‘나라는 집착’에서 오고, 이 아집은 망상분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헛된 욕심을 버리자면 아집을 놓아야하고, 아집을 내려놓자면 마땅히 망상분별을 쉬어야하지요. 망상분별을 쉬는 공부를 하자면 또한 마음의 공한 체성을 깨닫는 게 요긴합니다.


제생의세(濟生醫世)가 목적인 우리 교화에 있어서도 영적인 비움보다 물적인 채움을 추구한다면 교화가 막히겠지요. 마음을 비워서 자성의 공원정을 보게 하지 않고, 미혹한 마음을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이끄는 것은 바른 교화가 아닙니다. 욕심과 집착으로 막혀있는 대중의 마음을 비워서 통하게 해주는 것이 교화이며, 미혹되어 어두운 마음을 자기 성품의 지혜로 밝히도록 인도하는 것이 교화입니다.


흔히 조사의 선문답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것은 마음에 끝없는 분별망상이 있어서 성품의 지혜를 막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본래 그대로 텅 비어서 밝으면 저절로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저 남전스님은 병 속의 거위가 어떻게 밖으로 나왔다는 말일까요.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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