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뇌와 보리 - 외길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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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뇌와 보리 - 외길 열차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2.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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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91

중생은 도를 닦을 줄 몰라서 / 번뇌를 끊어버리려고 하네 / 번뇌란 본래 공적(空寂)하거늘 /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하네 / 한 생각 그 마음이 곧 옳거늘 / 어찌 딴 곳에서 찾으려고만 하는가 / 큰 도는 그저 눈앞에 있는데 / 미혹하여 뒤집힌 사람은 알지 못하네


(衆生不解修道 便欲斷除煩惱 煩惱本來空寂 將道更欲覓道 一念之心卽是 何須別處尋討 大道祗在目前 迷倒愚人不了)《誌公和尙》



우리의 마음바탕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한 것이지만 경계를 만나면 여러 가지 작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작용은 기쁨 혹은 슬픔, 즐거움 혹은 괴로움처럼 한 순간에 오직 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지요. 그래서 이 마음작용은 비유하자면 외길 철도를 달리는 기차와 흡사합니다.


공부인은 마음에 삼독심(三毒心)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일어났음을 스스로 보는 찰나,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저절로 사라져버립니다. 즉 마음속의 탐진치는 마음이 그것을 비춰보는 순간 마치 아지랑이처럼 실체 없는 것[空]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탐진치를 바라보는 ‘그놈’이 순간적으로 탐진치의 자리를 뺏고 그 자리에 들어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마음속의 삼독심과 그것을 바라보는 놈(즉, 깨닫는 마음)은 결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분별과 망상으로 요란해졌다 해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 요란해진 자기 마음을 바라보면 그 찰나에 마음은 곧 정념(正念: 망상분별이 끊어진 상태)이 됩니다. 즉, 망념(妄念)이라는 기차가 한 순간에 정념의 기차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것은 망념과 정념은 몸이 하나로서, 둘은 동시에 같이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스스로 정념이었다, 망념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념과 정념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예로부터 ‘물과 파도’로 비유합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를 여의고서는 보리를 따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번뇌의 몸이 바로 보리의 몸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번뇌가 다하면 보리도 또한 찾을 수가 없으니, 보리는 번뇌가 다한 데서 오는 깨침의 지혜로서 따로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번뇌를 떠나서 보리를 찾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런데도 많은 공부인들은 번뇌와 보리가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비슷한 말로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라고도 하지요. 정확히 말하면 둘은 서로 떨어지려해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라고 하는 존재가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따라서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중생 자신이 스스로 부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흙에 덮여 있는’ 금덩이라고도 하는데, 일체중생의 본성이 일원(一圓)이라는 가르침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위 말들을 잘 이해한다 해도 자기 스스로 성품을 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겠지요. 자기 마음속에 미혹은 미혹대로 있고, 저 바깥에 부처는 또 부처대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수행으로써 자기의 본성을 찾고[견성] 지키고[양성] 잘 쓰는[솔성]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며, 본성을 깨치는 것이 곧 진짜공부의 시작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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