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생의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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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생의 원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2.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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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93

대종사 봉래 정사에 계시더니 마침 포수가 산돼지를 그 근처에서 잡는데 그 비명소리 처량한지라, 인하여 말씀하시기를 「한 물건이 이로움을 보매 한 물건이 해로움을 당하는도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산돼지의 죽음을 보니 전날에 산돼지가 지은 바를 가히 알겠고, 오늘 포수가 산돼지 잡음을 보니 뒷날 포수가 당할 일을 또한 가히 알겠도다.」(인과품 12장)


나이 드신 분들이 하는 농담 가운데 ‘올해 6학년 5반’ 같은 말이 있습니다. 장난삼아 자신의 나이를 학년과 반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 말 속에는 지나간 청춘과 인생무상의 느낌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학년과 반으로 말고 또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무대 위 연극에서의 막(幕)과 장(場)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6학년 5반이라면 제6막 5장이 진행 중인 것이고, 저는 얼마 안 있어 제5막 7장이 시작됩니다. 각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니, 우리는 삶이라는 연극 속의 주연배우로 봐도 되겠지요. 사람마다 수명(壽命)이 다르고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이 있듯이 연극도 길고 짧은 게 있고 즐거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연극에 권선징악의 줄거리가 많은 것처럼, 우리의 삶도 각자 지은대로 받는 인과의 진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극에서 만약 우리의 전생(前生)·금생(今生)·후생(後生)을 제1·제2·제3막으로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가령 네 폭짜리 병풍에 봄·여름·가을·겨울을 차례로 그려 넣은 것처럼, 우리의 삼생(三生)을 한 연극 속에 담아서 보여준다면 아마 우리가 느끼는 숱한 삶의 의문들이 쉽게 풀릴 겁니다. 착한 사람인데 왜 그토록 복이 없는지, 악한 사람이 어째서 떵떵거리고 사는지 하는 것들 말이지요.


「경(經)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복을 짓는 것은 삼생의 원수다”라 하였습니다. 무엇을 삼생의 원수라고 하는가?


첫 번째 생에서는 어리석은 복을 짓느라 견성하지 못하고, 두 번째 생에서는 어리석은 복을 받아 부끄러움이 없어져 좋은 일은 안 하고 한결같이 악업을 지으며, 세 번째 생에서는 어리석은 복은 다 받았고 좋은 일은 안 했기에 육신을 벗을 때 쏜살같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 몸 받기는 어렵고 부처님의 법은 만나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하겠습니까?」《대혜종고 선사, 書狀, 答 湯丞相》


옛 조사의 위 말은 물론 복 짓는 일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 진정한 복은 자신의 성품을 보아서 진리(불생불멸, 인과보응)를 확연히 깨치지 않고는 우리가 오래도록 의지할 수 있는 궁극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이 마침내 그 힘이 다하면 도로 땅에 떨어지듯이, 본성의 지혜를 얻지 못하고 분별로써 짓는 복은 ‘유루(有漏: 다함이 있는)의 복’으로써 반드시 바닥을 드러낼 날이 있습니다. 따라서 견성을 해서 공적영지(자성의 혜)를 쓸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리와 둘 아닌 무루(無漏)의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인과보응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리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복을 열심히 지으면서도 혜를 닦지 않는다면 애써 지은 복이 뜻밖에도 스스로를 방심케 하고 미래를 그르치는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과 혜를 함께 갖추도록 해나가는 것이 불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지어서 나중에 받게 될 복은 어떤 복일까요.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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