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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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02.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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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99

「세존(世尊)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도솔천(兜率天)은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머물러서 수행하셨다는 곳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도솔천을 떠나지도 않은 채 왕궁가에 내려오셨고, 또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이미 중생제도를 다 끝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 같은 화두를 대할 때 우리는 먼저, 화두란 무엇이며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위와 같은 질문(화두)을 대하면 흔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쉽게 답을 얻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그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있다는 뜻이지”라고 풀이하면 “아, 그렇구나!”하고 끄덕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게 옳은 답인지 아닌지는 이어서 다른 화두를 만나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 화두타파(打破)란 ‘진리를 깨쳤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그 뒤에 또 어떤 화두를 내놓아도 다 풀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 해도 결코 화두의 정답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화두란 그냥 질문이 아니라, 구도자를 깨침으로 이끄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이치로써 묻고 답하는 보통사람들의 질문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 화두를 이치로써 풀려고 한다면 십년 이십년이 아니라, 백년을 붙들고 있어도 화두를 풀 수 없습니다. 아니, 논리와 이성(理性)으로 풀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애초부터 진리를 깨치게 하는 화두가 아닙니다.


깨침은 무엇인가요? 바로 언어의 길이 끊어진[言語道斷] 자리에 이르러서 유무를 초월하고 생도 멸도 없는 진리를 만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치로써 화두가 풀린다면 언어의 길이 열린 것이니 이는 처음부터 진리를 깨치는 길이 아니지요. 그러니 이치를 가지고 화두에 답을 하려는 사람은 영영 화두를 풀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화두는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예로부터 화두를 드는(의심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간절함’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화두란 실은 ‘드는’ 게 아니라 ‘저절로 들려야만’ 합니다. 즉, 구도인은 그 화두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서,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어야 비로소 진짜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도자가 이처럼 “왜?”라고 간절한 의심을 계속하다가 결국 이것이 극(極)에 달하면, 반드시 생각의 기능이 다 끊어지고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심연(深淵)에 이릅니다. 끝없는 좌절을 겪은 구도자의 마음은 그야말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가 되지요. 이것이 바로 화두타파를 앞두고 나타나는 깊은 정(定)입니다. 화두가 ‘처절하여’ 이 단계에 이르면 반드시 깨치게 되어있는데, 마치 군밤이 뜨거운 불에 한없이 부풀다가 어느 순간 ‘빵’하고 껍질이 터지듯, 화두타파도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이때가 곧 자신의 본래면목[본성]을 보는 순간이며, 말과 글을 떠나[不立文字] 부처와 조사가 따로 전한[敎外別傳] 소식을 깨치는 순간입니다.


참고로, 대종경 수행품 14장에는 ‘화두는 적당한 기회에 가끔 한 번씩 들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우리 교법은 마음을 단전에 머무는[丹田住] 방식의 묵조선법을 택하고 있어서 평소에 간화선을 함께 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수행인의 마음이 ‘텅 비고 두렷한’ 상태에 있을 때 문득 화두를 들게 함으로써, 순간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깨닫게 하시려는 뜻으로 보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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