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자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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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자기처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02.2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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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100

계침(桂琛) 선사가 법안(法眼文益: 885~958) 스님에게 말했다.


「흔히 말하기를, 삼계는 오직 마음뿐[三界唯心]이며, 만법은 오직 식일뿐[萬法唯識]이라고 하지.」


그리고는 뜰아래 돌덩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말해보라. 저 돌은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법안이 대답했다.


「마음 안에 있습니다.」


선사가 되물었다.


「행각(行脚)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마음속에 돌덩이를 넣고 다니는가?」


법안 스님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 안에 있을까요, 마음 밖에 있을까요? 아니면 마음 안에도, 밖에도 없을까요?


아무리 그럴 듯하게 말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바로 깨치기 전에는 뭐라 대답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조사(祖師)의 질문은 이론(理論)만 좀 알아가지고 뭔가 아는 체하는 사람의 숨통을 꽉 막아버립니다.


불자에게 ‘마음공부를 하라’는 것은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알면 마음의 자유를 얻는 길로 성큼 다가가지만, 모르면 삶에서 부딪치는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자신을 속박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모른다’는 사실만이라도 알면 그나마도 다행입니다. 언젠가는 스스로 마음의 본체(本體)를 찾으려할 것이고, 그리고는 결국 깨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교 2천5백년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길입니다.


우리는 유무념 공부로 나쁜 습관을 고치며, 삼십 계문을 지켜서 진급하는 삶을 살아야하고, 경전을 읽고 좌선 염불 기도로 혜를 닦으며 당처불공으로 복을 쌓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마음’을 통해서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으니, 마음을 시원하게 깨치지 못하면 마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칼을 아무데나 쥐고 요리를 하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니 올바른 스승이라면 ‘마음’부터 알고 나서 ‘공부’를 하라고 가르치는 게 순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마른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가 잘 맺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생이 악업을 끊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본디 악해서일까요. 그것은 자기 마음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이며, 그 이전엔 마음을 깨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수많은 조사들이 우선 ‘마음’을 알기 위해서 구도(求道)의 길을 나선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마음’을 구하는 것과 같고, 이 길은 다른 그 어떤 공부로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누군가의 노예는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남들과 같아도 자유를 빼앗겨서 스스로의 몸이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생도 저마다 자기 몸을 가졌지만 제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니 제 몸이면서도 그것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오직 마음이 몸을 다스릴 수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 각자는 자기 몸의 주인이 됩니다.


着火廚中眼忽明 從玆古路隨緣淸 若人問我西來意 岩下泉鳴不濕聲


부엌에서 불붙이다 홀연히 눈을 뜨니 / 이로부터 옛 길이 인연 따라 맑구나! / 누군가 나에게 조사 오신 뜻을 묻는다면 / 바위 밑 샘물소리 젖지 않는다 하리라.


《한암(漢巖)스님, 조계종 초대종정》


스승의 가르침을 우러러 받드는 사람도 좋지만, 우리 자신 안의 보물을 찾아서 그 가르침을 증명하는 사람이 더 참다운 제자입니다.


개벽시대의 종교인 원불교는 교조(敎祖)의 ‘열렬한 팬’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제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소태산대종사의 팬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일원의 진리를 깨닫고 지니고 삶에서 부려 쓰는 제자만큼 소중할 수도 없고, 교화를 잘 해낼 수도 없습니다.


깨치지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일원의 진리’라면, 조상이 만든 옛 고려청자(高麗靑瓷)를 내놓고 자랑만 늘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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