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을 마치며
상태바
칼럼을 마치며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02.28 0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칼럼이 나간 지 어느덧 100회가 지났습니다.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신 많은 법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쓴 칼럼은 본디 교리에 대한 해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마음공부와 진리적인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불자로서 저는 원기 80년 봄에 진리의 눈을 떴고, IMF시대에 자살이 급증하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지역신문에 ‘심경대(心鏡臺)’라는 제목의 마음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들을 추려서 2010년 말에 책을 출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한울안신문>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칼럼으로 함께 할 기회를 주신 오정행 교무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반평생을 허깨비로 살았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사람은 자기 마음의 ‘진짜 모습’을 깨치지 못하면 아무리 행복하다해도 진정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는 ‘더’ 행복하기 위해서 늘 끝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음이 행복의 직접적인 열쇠이며 ‘진리’도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마음’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곧 진리공부의 시작입니다. 그 누구든 ‘마음’을 빼고 불법이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며, 수많은 교리보다도 각자의 ‘마음’을 깨치고 바로 쓰게 도와주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예로부터 그러한 가르침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했고, 마음의 본질[空圓正]을 그대로 닦는 공부를 자성삼학(自性三學)이라 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수양·연구·취사는 잘 알지만 자성의 정·혜·계는 정확히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양· 연구·취사는 유념(有念)의 공부이고 자성삼학은 무념(無念)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수양·연구·취사를 계란이라고 한다면, 자성삼학은 그 안에 있는 노른자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일상수행의 요법 첫머리에 자성삼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원의 진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삼학공부는 무시선법입니다. 앞으로 천여래 만보살이 나오게 될 원천이며 온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이 법은 불교 사찰에 가서도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수행대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교단적으로 무시선 공부가 확산되어야합니다.


불법의 맥(脈)은 수행입니다. 그리고 21세기 현대불교는 빠르게 ‘수행’으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젊은 세대가 수행을 배우려고 불교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적이고 과학적인 교리를 가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기복적인 신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세계교화를 말하기에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원불교는 광범위한 수행운동이 일어나야합니다. 신앙에 의존하는 교화방식을 벗어나 수행위주의 종교로 전환해야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교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을 향한 찬양 열기로만 가득하고, 정작 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는 수행인들이 부족해선 원불교의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진리공부에 발심하고 정진하는 수행인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진정 개교 100년을 뜻 깊게 하는 일입니다.


새봄이 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마음에도 진리수행의 싹이 돋아서 자신성업과 교화불공의 물결이 함께 일기를 고대합니다. 모든 분들의 해탈성불을 기원합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소중한 글을 연재해 주신 라도현 교도님께


감사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