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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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9.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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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세관 교무와 함께하는 의두23 기행(32) / 우세관 교무(강원교구 김화교당)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불가에서 가장 유명한 화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의두요목 11조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1. 대령과 개령
그럼 마음이란 무엇이고, 진리와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도 때 외우는 청정주에 ‘태화원기성일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화(太和)란‘크게 화동하는 것’이란 말인데 ‘진리가 이 세상에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가 가득한 상태’ 즉 ‘진리의 큰 덩어리’를 다른 말로 ‘크게 신령스러운 것’이라 해서 ‘대령(大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령이 사람을 통해서 개별적인 영으로 나타나는 것을‘개령(個靈)’이라고 합니다.
‘대령과 개령’의 관계를 이해하면, ‘진리와 마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의 큰 덩어리인 ‘대령’이 개별적인 사람으로 태어날 때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개령’으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진리와 사람이 하나라는 말은 바로 ‘마음’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대령과 개령은 나타난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본래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사람도 분별의 세계에서 보니까 모양이 틀린 것이지 본래 같은 것입니다. 바로 사람에게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이 나고 자라면서 분별과 주착에 의해 마음이 오염되어 진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통해 분별 주착 이전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별 주착한 자리를 벗어나 본래 자리를 회복하면 그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령과 개령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마음이 또 하나의 진리요, 사람이 소우주로서 진리 당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불교에서는 법신불,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도교에서는 태극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곧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과 다름 아닌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 모든 것은 마음이 작용하고 만든 것이란 뜻입니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5장에 보면 “대령과 개령과의 관계는 어떠하나이까?”하고 묻는 말에 답하시기를 “마음이 정한즉 대령에 합하고 동한즉 개령이 나타나는 것이니, 정즉합덕(靜則合德)이요 동즉분업(動則分業)이라, 죽어서만 대령에 합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일여니라.”하셨습니다.


#2. 유심과 유물
또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40장에 보면 “귀교는 유심입니까, 유물입니까.”하고 묻자 답하시기를 “물심일여(物心一如)로 보나니, 우주 만유의 본체는 물과 심이 둘이 아닌 동일체이나 운용하는 데 있어서는 심이 체(體)가 되고 물이 용(用)이 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일체유심조라 하니까 유물론자들이 유심이라는 말 때문에 불교를 비판하곤 했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와 레닌이 유물론을 설파한 이래 지금의 공산권 나라들이 이 유물론을 받아들여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이고, 사람도 물질일 뿐인데 그 물질의 변화에 의해 사람도 변화하는 거라는 겁니다.
한때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이 이 유물론을 받아들여 그것에 의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했나요?


사상적 진화가 없었던 근본적 사회주의권은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물질과 마음의 결합으로 진화했던 북한의 주체사상도 독재의 이용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과거 치열했던 운동권의 양상도 사람과 생명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때를 풍미했던 유물론은 수정과 진화를 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금 사람의 마음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그 당시 고리타분하다 여겼던 정산종사의 법문이 깊은 맛을 우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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