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과 대각일성
상태바
일원상과 대각일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10.23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길튼교무의 정전산책(34) /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대종사님은 대각을 이루시고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서품 1장)라 선포하셨습니다.



# 절대계와 현상계


한 두렷한 기틀이 바로 ‘일원상’의 다른 표현으로, ‘한’은 일(一)이며 ‘두렷함’은 원(圓)이고‘기틀’은 상(相)으로 상응되기 때문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는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로서 이를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능히 유상하고(能以成有常) 능히 무상하여(能以成無常) 유상과 무상 두 방면으로 전개된다 하였습니다. 즉 ‘생멸없는 도’는 유상으로 보면 전개되는 진리이고, ‘인과보응의 이치’는 무상으로 보면 전개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실상(實相)은 절대계와 현상계가 서로 바탕된 자리로서, 절대계는 생멸이 없는 자리이고 현상계는 상대적인 인과의 세계입니다. 절대계가 이원성이 없는 자리라면 현상계는 상대적인 이원성으로 원인 결과로 연기(緣起)되는 세계입니다. 또한 생멸없는 절대계의 도는 문득 한 번에 깨칠 수 있으나 인과보응되는 현상계의 이치는 하나씩 닦아가는 노력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하고 고뇌가 영멸(永滅)한 자성극락이며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으며 소소영령(空寂靈知)하여 매(昧)하지 아니하는 자심미타입니다.(『정전』 염불의 요지) 이 자성극락과 자심미타가 바로 생멸없는 절대계입니다.


또한 현상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주고받는 세계로서 서로서로 의존되어서 혼자만 독존(獨存)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즉 남에게 도움의 신세를 지거나 남의 피땀에 바탕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이며, 마음의 작용도 육근-육경-육식이 독자적으로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가유(假有)적으로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 ‘이 가운데’의 의미


만유와 만법이 현상계라면 한 체성과 한 근원은 절대계입니다. 그리고 만유와 만법을 구분하여 본다면 만유는 형상이 있는 구체적인 만물이라면 만법은 생각, 감정, 사상, 이데올로기 등의 무형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은 ‘이 가운데’라 하셨습니다. ‘이’는 인과보응되는 만유와 만법의 현상계와 생멸없는 도인 한 체성 한 근원의 절대계를 가리키며‘가운데’는 그 사이에서의 뜻입니다.


현상계와 절대계는 서로 바탕해 있습니다. 절대계에 근거하지 않는 현상계는 인과에 끌려만 다니고 현상계에 바탕하지 못한 절대계는 자기초월에만 매몰되어 현실로 나오면 나약해지고 허무합니다.


다만, 이렇게 절대계와 현상계를 구분하여 설정하면 이것도 분별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일체의 분별이 없는 자리도 상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상대가 없는 자리를 따로 설정하면 이 자리는 상대 밖의 절대로서 이원성에 떨어진 분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절대와 상대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차원으로, 절대를 깨달아 상대로 나오고 상대 속에서도 절대에 바탕한 자리입니다.


생멸없는‘체성과 근원’에서 인과보응되는 ‘만유와 만법’의 현상계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 현상계에서 생멸없는 절대계를 활용해야 되며 이럴 때 인과에서 벗어나 인과를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因果不昧)


이처럼 만유-체성, 만유-근원은 서로 바탕된 본래 하나 자리(一)로 원만한(圓) 실상(相) 즉 일원상 자리입니다. 절대계와 현상계가 서로 바탕한 하나이고 현상계는 이원성이 없는 절대계에 바탕하여 일체의 이원성에 걸림이 없이 현상계를 나투고, 절대계는 현상계에 근거하여 절대계를 현실화하는 원만한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세계(성리품 10, 17장)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