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세월도 정화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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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세월도 정화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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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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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은광 교무 (원광대학교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은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주기 때문



바람 부는 날에는 길가에 억새풀들이 말을 전해주었다. 세상 사람들 절반 정도만 바보였으면 좋겠다. 얼마 전 밥상머리에서 뜬금없이 집식구가 말했다.“ 지금 영자는 잘 사는지 몰라.”연예인‘누구’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산골소녀 영자를 이야기하는 거다. 아마 10여년 전, 그당시‘인간극장’TV
프로그램에서 소녀와 아버지가 산골오지에서 문명의 혜택없이 사는 모습을 다큐로 제작해, 세상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보는 자신들과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 당시엔 그랬다. “가게에 생수를 팔다니 이젠 물까지 사먹는 시대가 왔다”하며 코웃음을 지었다.


이야기를 꺼낸 안사람은 오늘은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눈물 좀 흘리는 영화를 예매해 놨다는 뜻.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My Love, Don’t Cross That River)”였다. 영화를 본 일요일 오후는 저녁 되어 눈이 계속 쌓이고 창밖은 눈시울처럼 흐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다 두 마음을 감추고 사는구나, 하나는 추억에 매달은 아쉬움과 안타까움 또 하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서 흐림과 건조함이 번갈아 교차하는모습이다. 가끔 친구는 이렇게 전화했다.“ 요즘 내가 드라이(dry)해. 사는게 어쩐지 메말라 촉촉하지가 못 해.”감성조차 형식이 되어 버린 날,“ 나도 그래”하고 말할 뻔했다.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을 가슴에 쓸어담아 보았다.
‘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세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에 풀을 잠아주고 일으켜주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를 음미할 때마다 마음은 투명했다. 새벽에 일어나 좌선을 하며 “사람은 병이 생기면 병원에서 치료하면 되지만 상처 입거나 병든 영혼은 누가 치료하게 되는가”하고 되물어 봤다. 이 땅에 이름 없는 시인들이, 마른 들녘에 서성이던 새들처럼 떠돌던 욕심없는 수행자들이 또 조용히 등불 밝히고 삶의 의미를 써내려 가는 작가들이, 외로움과 불안을 함께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마음의 사념은 연말이 되니 지난 시간의 메아리 되어 되돌아 눈처럼 쌓인다. 12월 초, 서울에서 목판화 그림 전시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는 공간이 더 크게 느껴졌다. 시계소리도 정지된 서재에 오랫동안 친구가 되었던 책, “내 생애 단 한번”의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가 생각나고, 무소유를 실천했던 수행자가 세상 인연이 다돼 평소 입던 가사 한 벌로 다비장으로 떠날 때“스님 불 들어 갑니다”하며 제자가 장작불을 집어 넣어 육신의 마지막을 고하고 이어 한줌의 재[灰]가 되는 모습에서 나의 마음은 오히려 가볍고 평온했다.


크든 작든 모두가 불꽃같은 삶을 살았고 떠날 때는 한줌의 재로 일들이 남은 이들에겐 무심하리만큼 맑은 정화그것이었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거”라는 것은 세속에 남겨진 사람에게 남기는‘게송’같은 의미였으리라.


지금쯤, 금강 하구둑에 서면 사람 키 만큼 큰 갈대들도 흔들리며 잠을 깨고 또는 눈을 맞고 참선하고 있다. 마음이엉켜 앞이 안 보일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갈대들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라. 세상은 어차피 흔들리며 못난 인연들과 손 잡고 살며, 빛 바랜 달력처럼 살아온 시간의 나그네, 그리고‘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할머니가“할아버지, 나는 죽어서 저 산 위 높은 데서 꾀꼬리가 되어, 훨훨 노래하며 다닐거야”하던 말처럼, 그렇게 훨훨, 그 메마르고 허접했던 꿈조차 우리가 간직한 영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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