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처불상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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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처불상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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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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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길튼 교무 / 나주교당


대종사님은「교리도」에서“인과보응의 신앙문”의 귀결로‘처처불상 사사불공’을 제시하십니다. 처처불상은 모두가 부처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부처라는 말은 수행의 여부를 떠나 존재 그대로가 부처라는 말입니다. 보통급도 부처요 대각여래위도 부처라는 것입니다. 처처불상은 수행의 결과로써의 부처가 아니라 불공의 대상으로써의 부처인 것입니다.


# 처처불상과 비극성


대종사님은 우주만유 전체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고 신앙하여 모든 죄복과 고락의 근본을 우주만유 전체 가운데에서 구하라고 하십니다.(교의품 12장) 이런 불공의 대상인 상대를 죄복의 권능자라 하셨습니다. 나의 노력에 대해 비대칭적으로 나에게 죄도 줄 수도 있고 또는 복도 줄 수 있는 권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부처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아줄 수도 있고 뿌리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또는 상대가 손을 내밀어 주어야만 잡을 기회(은혜)가 원초적으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사이에서 내 사랑의 요청을 상대가 받아주어야만 연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이런 자유로운 부처이면서 또한 상대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처처불상의 비극이요 은혜의 비극성입니다.


처처불상인 상대는 각자 각자가 자유로운 주체입니다. 각자 각자는 타자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만일 상대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에게 불공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연장(延長)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내 팔을 대신하여 심부름하는 노예로 또 다른 팔이며 내 밖으로 연장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상대부처는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사사불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처처불상은 유토피아적이고 낭만적인 희극개념만은 아닙니다. 내 말을 들어주냐 안 들어주냐는 절실한 현장이며 이렇게 불공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부처이기에 은혜입니다. 은혜와 불공에는 당연히 주는 것이 아닌, 안 줄수도 있는데 주는 절실한 요청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비극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권한이 상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은혜이지만 비극성을 내포한 은혜입니다. 상대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내 말을 안 들어줄 수 있기에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내 말을 들어주도록 청원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처럼 불공은 필요조건일 뿐이며 필요충분조건은 상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하셨습니다.(以天食天) 이는 우리가 상대의 피와 땀에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신세를 지는 폭력이 아예 없는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처처불에게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신세를 최소화하는 것이 불공이 될 것입니다. 덜 신세지도록 폭력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이 비극성을 이해하여 절실히 수용해야 합니다. 이 비극적 은혜를 이해 못하면 폭력을 희극적 은혜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 사사불공과 금기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가장 첨예한 대립은‘금기’의 계문에서 발생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지 말라는‘금기’를 매개로 사회화됩니다. 왜냐하면 금기란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 영원히 지속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금기의 기준이 있다고 여기지만 이런 금기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금기에도 사회성과 역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마다 달라지고 역사에 따른 변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에 따라 금기의 기준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대립충돌하게 됩니다.


이런 세대 간의 대립을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떤 일정한 기준을 못 박아놓고 이를 따르라고 하면 폭력이 됩니다. 상대부처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 부처님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되 이런 자유의 마당에서 그 시대의 타당함을 합의해 내야 하는 것이 사사불공입니다.(대담윤리) 미래의 사사불공은 각자의‘좋음’에 바탕하여‘옳음’의 보편타당성을 합의해 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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