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드리는 또 다른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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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드리는 또 다른 기도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04.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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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보은 교도 /상담심리전문가, 신촌교당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인양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진정한 치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1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작년 4월 봄꽃이 한창이던 그날, 꽃봉오리보다 환한 아이들이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되는 모습이 생중계되는 걸 보며 온 국민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었다. 단원고가 있는 안산은 내겐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처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홀로 임대 아파트를 얻어 살았던 곳이 바로 안산이다. 남다른 정을 느껴온 그곳의 아이들이 당한 참사 앞에서 더 이상‘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난 용기를 내 거리로 나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전국 각지에서 나와 같은 다짐을 품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나처럼 평범한 시민들이 많다는 게 반갑고 놀라웠다. 약 700만 명의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서명을 해주셨고 진상규명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과를 정부에게 전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상규명은 커녕,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유가족들이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받는 잔인한 현실만이 이어지고 있다.


서명운동을 마무리 짓고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참사의 기억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안함과 부채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여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참회하는 마음으로 홀로 진도 팽목항에 향하기로 했다. 처음엔 온전히 혼자서 나만의 위령재를 드리고 올 생각이었는데, ‘세월호를 기억하는 원불교인들의 모임’이 도보순례를 하며 진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다가 진도행 고속버스에서는 도보 순례단 취재차 진도를 향하는 어느 교무님을 우연히 만난 게 아닌가. 순례에 합류하는 건 운명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순례 계획은 없었기에 난 복장도 신발도 열악했다. 체력 또한 튼실하지 못해서 자꾸 순례단의 맨 뒷줄로 쳐지곤 했다. 중간에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수장된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눈망울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일주일 동안 익산에서 진도까지 걸어 온 도보 순례단은 뙤약볕에 타서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들은 빗줄기에 흠뻑 젖기도, 발이 부르트고 까지고 무릎이 풀리기도 하면서 묵묵히 걷고 또 걸으며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 정부의 시행령 폐기를 외쳐온 것이다.


그들을 보며 종교란 무엇인가, 작금의 이 나라에서 과연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정치권력과 유착되어 권력을 비호하는 시녀로 전락하거나 소외된 이들의 아픔과 함께 하기보다는 교세확장에만 더 치중하는 타 종교들의 모습을 보며 난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그에 비해 도보 순례단의 실천이야말로‘온몸으로 드리는 또 다른 기도요, 위령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인양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진정한 치유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팽목항에 도착한 뒤 무심히 흐르는 푸르른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내 마음으로 눈을 돌려보았다. 내 마음 속의 분노가 일회적이고 공허한 구호로만 화하지 않으려면, 슬픔에 찌든 냉소로만 전락하지 않으려면, 반성이 자신을 한없이 해하는 자책으로만 돌아가지 않으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하는 일에 대해,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부터 하나씩 손꼽아보았다. 그리고 함께 한 교무님들과 교도님들, 이시대 마지막 게릴라들 같기도 한 도보 순례단이 원으로 모여 서있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분들 주위로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일원상’이 둥글고 환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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