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을 하루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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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을 하루같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05.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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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관 교무 / 강원교구 김화교당


우주 만물이 비롯이 있고 끝이 있는가 비롯이 없고 끝이 없는가.


의두요목 16조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작과 끝은 변화이고, 이 변화는 인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두의 궁극은 실천에 의한 진리적 삶의 구현입니다.


#1. 영생을 얻는 법


무시무종 속의 변·불변하는 이치를 깨치면 삶이 달라집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바탕이 있습니다. 그 우주속에서 우리도‘인과’따라 변화하며 영원히 불생불멸합니다. 그래서 우주의 무시무종을 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불생불멸할 수 있는 그 바탕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원리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진리와 하나되는 바로 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리를 깨친 사람은 거짓 인연에 끌려 다니지 않고, 분별시비에 얽매이지 않고, 자성을 떠나지 않아, 천지와 내가 하나가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소영령한 인과의 이치가 그 속에 작용하여 무시무종속 불생불멸을 이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불생불멸을 깨친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게 하는 또 하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백년을 살아도 길다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도 짧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성을 깨치지 못한 사람은 분별 때문에 백년을 살면 오래 살았다고 기뻐하고 삼십 구년을 살면짧았다하여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백년도 잠깐이요 찰나입니다. 반대로 백년도 영원이고 하루도 영원입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를, 찰라 찰라를 영원처럼 소중하게 사는 것입니다. 찰라를 감사보은으로 살기에 생사해탈이요 일념만년의 생활인 것입니다. 때문에 과거 미래의 삼세가 없이 일념즉시 무량겁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불가득(不可得)이라 하였습니다. 분별로서 어느 시간에 얽매인 마음이 아니라 본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일관된 마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영겁을 하루같이


이 의두의 실천 방법은 자명해졌습니다. 하루를 영원처럼 소중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영겁을 하루같이 산다’는 것은 그‘진리를 아는 사람의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계절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은 한 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의식 때문에 영생(永生)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노병사를 겪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허무를 느끼거나, 시비(是非)에 휩싸이거나, 이해(利害)에 지나친 집착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겁(永劫)을 아는 이들은 작은 부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찰나(刹那)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보면‘하루’의 의미를 담은 문구가 나옵니다. 은나라 탕왕의 반문인‘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 있는데‘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또 어제와 달리 부처로 진급하는 삶을 살자는 말입니다.


따라서‘영겁을 하루같이 사는 자세’는 첫째,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는 것’입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한 생에 얽매이지 않고, 착심을 없애야 합니다. 생사 해탈을 하고 무착행을 하는 것은 영생이 있음을 깨닫는데서 가능해 집니다. 그래야 영겁을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하루같이 살 수가 있지요.


둘째,‘ 부처로진급하는삶을사는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살되 나날이 새롭게 하여 더욱 진급하는 삶을 계속하여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영생을 통해 반드시 부처의 위를 만들어 가자는 다짐입니다. 역시 영생이 있음을 깨닫는데서 진급을 위한 노력이 가능해집니다.


저희들은 법당을 찾아 두 손을 모읍니다. 마음과 몸을 닦고, 믿음과 정진으로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의 심정을 표현한 성가 135장은 사무친 서원 일념과 고요하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표현입니다. 의두요목 16조, 무시무종의 의미를 깨치라는 것은 결국 이와같이 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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