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을 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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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을 응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07.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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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도상작가의‘인문학으로대종경읽기’04-1 정법현 교도 / 북일교당


소태산이 십인 일단의 교화단 조직 방법을 제정한 뒤에 첫 교화단을 조직하면서“단장은 하늘을 응하고 중앙은 땅을 응하였으며 팔인 단원은 팔방을 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대각한 이후에도 소태산은 교화단 조직의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 깊은 성찰과 진리탐구에 정진했다.



그 결과 시방세계를 모두 담아내고 운행할 수 있는 조직의 틀을 찾아내고, 시방세계 즉 우주의 궁극적 형상인 일원의 진리로 교화단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땅에 응하는 중앙의 자리는 비워두었다. 여기에 소태산의 깊은 뜻이 있다.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적임자가 아닌데도 가까운 사람이라고 무리하게 배치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아무리 제도와 체계가 완벽하게 구비된 조직이라고 할지라도, 그 조직을 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소태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산종사 법어>의 맨 처음은 원기2년 7월에 대종사께서 이 회상 최초로 단을 조직하실 제, 먼저 8인으로 단원만 정하시고 중앙위는 임시로 대리케 하시며 말씀하시기를“이 자리에는 맞아들일 사람이 있느니라”하시고 기다리기를 마지 아니하시더니, 드디어 정산종사를 맞아 중앙위를 맡기시니라.로 시작된다.


그 일에 대해서는 <원불교대사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일부를 발췌하고 문장을 다듬었다. “하루는 김성섭(金成燮)을 불러‘전북 정읍 땅에 경북 성주에서 온 송모라는 젊은이가 있거든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김성섭이 정읍을 찾아가 송도군(宋道君)을 만나 소태산의 말씀을 전했다. 도군 또한 숙연임을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나 역시 큰 원을 품고 수 백리를 정처 없이 왔으나 항시 마음에 무엇이 걸린 것만 같아 걱정하던 중 오늘에 불러 주시니 이제 영겁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하며 즉시 동행하려 했다. 그러나 집 주인(김해운)의 만류로 김성섭만 영광으로 돌아갔다.


김성섭이 돌아와 그 사유를 고하니 소태산은 미리 짐작한 듯 했다. 두어 달이 지나 소태산은 김성섭을 대동하고 정읍 화해리 김해운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은 뒤에 송도군과 사제 겸 부자의 의를 맺고 말했다. ‘이 일이 우연한 일이랴? 숙겁 다생에 기약한바 컸었느니라.’소태산은 송도군을 영광으로 데리고 와 교화단의 중앙에 임명하고 제반 사무를 대행하게 했다. 여덟 명의 제자와 일반 대중은 송도군이 열아홉살에 불과했으나 장형같이 숭배하며 받들었다.”


그 만남의 순간이야말로‘하늘에 응한 사람’소태산이‘땅에 응한 사람’ 정산을 만나는 위대한 개벽의 순간이었다. 마침내 하늘(天)이 땅(地)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정산종사는 송규(宋奎)와 송도군(宋道君) 두 개의 이름으로 원불교의 초기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송도군이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며 그 뜻은‘도를 구하러 다니는 청년’이란 뜻이다. 가끔 ‘도꾼’이란 표현이 보이는데 도군(道君)을 그리 발음한 것이다. 소태산은 ‘도꾼’인 송규를 제자로 맞아들여 정산(鼎山)이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정산은“솥산”이다. 솥(鼎)은 중국의 고대사에서‘국가, 왕위’등을 상징하는 말로 두루 쓰였다. 정은천하를 다스릴 덕과 정통성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이 기거하는 궁궐에 반드시 거대한 솥을 설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솥(鼎)에 대한 정의가 충분하지 않다. 언젠가 읽었던 <주역>의 50번째 괘가 정괘(鼎卦)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즉시 교보문고로 달려가 여러 책 중에서 왕필(王弼)의 주석이 붙은 <주역>을 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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