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수행의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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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수행의 이중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11.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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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길튼 교무 / 나주교당


『정전』「일원상 서원문」의‘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의 구체적인 방법은‘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는 것’이라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원상을 체받는 것은 삼학수행으로 한정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일원상을 체받는 것은『정전』「일원상의 수행」의‘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것’이기에,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수행의 강령인 삼학뿐만 아니라 신앙의 강령인 사은까지 포함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일원상 서원문」에서의 삼학은 좁은 의미의 삼학으로만 해석하기 보다는 넓은 의미의 삼학으로해석해야 타당할 것입니다. 수양-연구-취사는 피은-지은-보은으로 가로지르기 때문입니다.



『정전』「사은」의‘천지보은의 결과’에서“천지같은 위력과 천지같은 수명과 일월같은 밝음”은 각각 취사력, 수양력,연구력와 상통해 있으며, 작업취사 과목으로‘사은의 도’를 단련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서품 19장)


# 신앙과 수행의 관계


신앙에는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이 있으며, 타력신앙을 신앙 · 자력신앙을 수행이라 달리 표현할 수 있으며, 이를 포괄하여 자타력병진신앙(自他力竝進信仰) 또는 신앙과 수행을 병행한다 합니다. 그리고 이 자타력병진신앙을 넓은 의미(廣義)의 수행이라고도 하기에,『정전』수행편의 수행은 신앙과 수행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수행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신앙하고 보은할때는 사실 수행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곧 수행이며 수행이 신앙이 됩니다. 둘로 나뉘어서 그 경계에서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두 모습입니다. 하나를 나투는 중심축과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가“법신불 사은이시여”할 때 자성불自性佛의 자력신앙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은 두 부류가 아닙니다. 다만 타력에 중심축을 둔 효과가 있고 자력에 중심축을 둔 효과가 다를 뿐입니다. 근본이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할 자리가 있고 염불할 자리, 좌선할 자리가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경계를 따라 중심축을 달리 세울 뿐입니다.


“법신불 사은이시여!”라고 기도하는 그 순간, 신앙과 수행이 하나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법신불 사은이시여!”라는 간절한 기도 속에 자성불이 역력히 드러나있는 모습을 보아야 하며, 성품에 사은의
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을 느껴야 합니다. 보은에 삼학수행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삼학수행에 사은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주산 종사는『회보』34호「신앙과 수양」에서 우리의 자성이 우주의 본체요 우주의 본체가 우리의 자성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심불일원(心佛一圓)은 즉 부처님의 마음을 대표한 진리적 부처님이라 할 것입니다. 두렷하고 텅 빈 이 일원의 속에는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어느 것 하나 포함되지 않음이 없나니, 그야말로 속으로 들어와도 안이 없고 겉으로 나가도 밖이 없는 우리의 자성이며 우주의 본체입니다.”


내재적 자성이 곧 우주성으로 자성과 우주는 구분이 없습니다. “법신불 사은이시여”할 때는 자성불이 결여되어 있고, 자성불 수행만 하면 신앙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은 다 분별심인 것입니다. 신앙과 수행은 방법입니다. 다 귀결은‘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신앙하는 것이 절대자의 힘을 빌려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한 헌신이 아니라, 절대자에 귀의하는 일심으로 그 마음당체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당체에는 도(道)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도에 합일하면 일원의 극락을 수용하고 그 도 대로 행하면 복락이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것도 의심에 일념이 되든지 호흡에 일념이 되었든지 마음자체를 직관하여 성품자리를 확연히 꽤 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품에 구족해 있는 수양력으로 경계에 편안하며, 이 성품의 연구력으로 경계를 밝게 비추고, 이 성품의 취사력으로 경계를 굴리어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과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 일원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양대방법이며 또한 일원의 진리를 나투는 이중주인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신앙하고 보은불공할 상황이 있고, 경우에 따라 수행하고 정진적공할 상황이 있는 진리의 연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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