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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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부처님
  • 박동욱
  • 승인 2001.06.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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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김관도(성곤) 종로교당"새삶회 부회장


개인체험을 통한 원불교
원불교를 소개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제가 원불교를 알게 된 과정, 그리고 원불교 선택한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원불교에 접근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교까지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 어떻게 하면 유명한 사람이 되고 좋은 대학에 가서 잘 생긴 부인 얻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고려대 사학과에 다니게 되었는데,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한참 학생운동이 풍미하던 시절이라 저 역시 데모를 하게 되었는데 고대휴교령이 내려지면서 46명의 학생이 한번에 제적 당하는 동시에 감옥에 가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 아버님이 여당 고위직에 있는 관계로 친구들은 저를 정부의 프락치로 판단 하고 완전히 왕따를 시키는 거였습니다. 참 괴로웠습니다. 저는 분명 프락치가 아닌데 아무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때 세상이 아무리 믿지 않더라도 분명히 진실은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뒤 감옥에서 나와 친구들을 따라 경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과 과학에 심취해 우주의 시작, 생명의 탄생에 관해 공부하면서 이상한 체험을 갖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 별이 쏟아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부모님 몰래 돈 훔친것, 아버지 시계팔아 놀러간 것 등 예전에 거짓말 한 것이 하나 둘 기억되면서 이것을 부모님께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해 다 고백하고 다시는 나쁜 짓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뒤 대학에서 제적이 되어 학교를 갈 수는 없는 처지라 연세대 신학과 교수님들께 찾아가 사정말씀을 드리고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연세대와 서강대를 다니며 정말 제 인생중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독교의 주장입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과 태생적으로 이슬람 국가나 성경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정의의 하나님’이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습니다. 만나는 교수님들께 아무리 질문을 하고 책을 찾아보아도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박중빈의 불교혁신론
그래서 동양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고대 불교학생회를 찾아가 불교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는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대로 불교를 이렇게 현대적으로 쉽게 하면 좋을텐데 하는 단편적인 생각을 하게 됐죠. 그무렵, 『창작과 비평』을 우연히 읽다가 한용운 스님의 「불교유신론」과 박중빈의 「조선불교 혁신론」을 비교하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박중빈의 「조선불교 혁신론」을 읽어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이 이미 다 나와있어요. 그래서 ‘아 박중빈이라는 분의 사상을 알아야겠다’ 했는데 박중빈이 다름 아닌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님이었고 그래서 원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종로교당을 찾아가 교무님께 교전을 구하게 되었는데, 교무님께서 원불교는 단결이 잘되서 대통령 말씀을 잘 따른다고 해요, 저는 박대통령 반대하다가 제적을 당했는데 마음에 별로 내키지가 않더라구요, 또 제가 바란 것은 불교를 개혁하는 것이었지, 부처님이 아닌 새로운 교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알겠다’고 대답한 뒤 교전을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교전을 보고 원불교에 빠져든 것은 몇달 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당시는 몰랐지만 할머니의 장례식을 원불교식으로 치뤘는데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원불교 교전이 나와요, 그래서 이곳 저곳을 읽게 되었는데 그때 제마음에 딱 다가선 법문이 있었습니다. 그게 교의품 1장과 전망품 13, 14장이었습니다.

원불교 교전보며 얻은 대답
교의품 1장과 전망품 13장을 보니, 기독교를 공부하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이 풀려요, ‘진리가 둘이 아니구나, 모든 종교가 근본은 같구나’하는데서 큰 감동을 얻었습니다. 또 전망품 14장을 보면서 더욱 종교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기독교 장로가 대종사에게 감동이 되어 스승으로 모시려는데, 종교를 바꾸려고하니 양심에 찔린다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자 대종사는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하신 말씀에 바로 입교를 결심하고 교도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이왕 공부하는 것 교무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에 원광대학교 교학과에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고대 제적생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고 저는 여기에 실망하던 터에 현재 ‘로버트 김’으로 알려진 저의 형님으로부터 “한국에 있어봐야 대학도 못들어가고 공부할 수 없으니 미국으로 오라”는 기별을 듣고 템플대학 4학년에 편입하여 종교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국회에도 나갔지만, 국회생활을 하면서 죄복을 결산해 보니, 아무래도 복보다는 죄가 많아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천안 국립중앙청소년 수련원에서 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일원상의 의미
원불교 하면 누구나 궁금하게 생각하는게 동그라미인 것 같습니다. 서울의 곳곳에 왠 건물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을 종종보는데 그것이 진리를 상징한 일원상입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아무것도 모시지 안았죠.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불상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선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마저 없애라’는 선구(禪句)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신앙의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되고 십자가나 불상이 모셔지게 됩니다. 그런데 진리는 보편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를 형상으로 표현하다보니 일원상이 진리를 원만히 표현했다는 의미에서 진리의 대상으로 일원상을 모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우열을 평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일원상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물었을때,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란 곳곳이 부처요, 일마다 불공이라는 뜻인데 진리란 무엇이냐, 곧 우주만유 모든 것이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모든 일이 곧 부처님을 모시는 것, 불공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도교에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것인데, 사실 ‘어린이’라는 것도 천도교에서 만든 말입니다. 그 전에는 ‘어린 놈들’이라고 해서 사람취급을 안했습니다. 아녀자들도 마찬가지이죠, 그런데 ‘그 이’ ‘저 이’라고 할 때의 ‘이’라는 존칭을 붙여서 ‘어린이’라는 존칭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사람이 곧 하늘이다’하는 것이 곧 ‘사람이 곧 부처다’하는 것에 연상선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만이 아닌 모든 물건이나 사물도 부처다. 그래서 그 쓰임새에 따라 불공드리듯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불교 수행의 요지는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리 접고 앉아 있는 것만이 선(禪)이 아니라, 사람은 끊임없는 상념 속에 사는데, 무시선 무처선이란 어떤 경계를 만나든 본래자리를 잃지 않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한번은 공보처에 가서 일을 보는데 화가 납니다. 내 마음이 경계에 끌려서 화내면 지는 것이다. 나의 본래자리는 화내는 게 아니지, 하고 돌이키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일하는 가운데 선하고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를 대하든 요란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고 그르지 않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무시 무처의 수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생활 가운데 모든 경계가 부처요, 행동하는 것은 곧 불공이니, 신앙과 수행이 생활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일원상 신앙과 수행의 입장에서 볼 때, 생활과 불법을 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불교 교리표어에 ‘생활시불법’ ‘불법시생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불교는 그래서 곧 불법을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학에서 성(聖)과 속(俗)을 나누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나누는데, 궁국에서는 둘이 아닙니다. 종교는 깨끗해서 깨끗한 것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불교와 기독교, 여러 종교인들이 의사가 되어 이 사회를 이 세상을 함께 공동으로 치료한다면 환자의 병을 더 빨리 완치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정리: 박동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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